신학자 고 안병무(1922~96)박사는 역시 고인이 된 서남동 전 연세대교수와 함께 60,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서서 「민중신학」을 한국의 토착사상으로 정립했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50년), 6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70년 11월 노동자 전태일 분신자살사건에 충격을 받아 예수와 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예수를 인격이 아닌 역사적 사건의 관점에서 파악한 것이다. 교리의 옷을 입은 예수가 아니라 억압받는 땅 갈릴리에 나타난 예수를 찾으려 했으며 이를 70년대 한국의 암울한 역사현장에 적용했다. 「예수가 민중이고 또 민중이 예수」라는 민중신학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났고 독일 등에서 수십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유럽과 미국의 유수한 신학대가 「민중신학(Minjung theology)」이라는 정규강좌를 개설할 정도로 세계 기독교계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안박사는 사회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다. 문익환·동환 형제 목사와 서남동 이우정 이문영 교수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두 차례 해직(75·80년)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후학들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먼저 중앙신학대(현 강남대·50~70년)와 한신대(70~75년)교수로 재직하면서 길러낸 제자들이다. 갈릴리의 민중과 예수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민중신학을 발전시킨 황성규(전 민중신학회장·한신대)교수가 대표적 후학이다. 서구의 신학방법론을 통해 신약 갈라디아서를 민중신학적 측면에서 조명한 김창락(한신대), 기독교를 예수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하고 민중신학을 문화신학으로 접목·발전시킨 김경재(한신대)교수와 구약의 출애급사건을 민중신학적으로 분석, 민중신학의 구약적 토대를 구축한 김이곤(한신대)대학원장, 민중신학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등 민중신학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는 박종화(한국기독교장로회 총무)목사 등이 맥을 잇고 있다.
두번째 제자그룹은 그가 73년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를 통해 배출한 후학들이다.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손규태(성공회대), 민중신학을 전통신학적 입장에서 해석한 임태수(호서대), 민중의 생활·사건·운동을 중점 연구하면서 민중신학 계승에 힘쓰고 있는 김성재(한국신학연구소 이사장·한신대), 신화적 이해에 머물렀던 요한복음을 민중신학으로 해석한 최영실(한국신학연구소장, 성공회대), 경제신학적 측면에서 민중신학을 발전시킨 채수일(한신대)교수와 한국사상사적 관점에서 민중신학을 조명한 박재순(한신대 강사),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민중신학을 계승한 강원돈(한일장신대 강사), 사회과학이론의 바탕에서 민중신학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는 최영묵·김진호씨 등이다.
마지막 그룹은 주로 한신대 출신으로 일선목회활동을 하면서 민중신학을 전파하고 있는 목회자들이다. 이해학(성남 주민교회) 고완철(광명 계명성교회) 노창식(신명교회) 오용식(영은교회) 김경호(강남 향린교회) 정상시(민중교회) 윤인중(새벽교회) 김진호(한백교회) 정원진(향린교회)목사 등이 대표적이다.
후학들은 『선생께서 평소 노자의 「공성이불거(공을 이루면 거기에 집착해 머무르지 않는다)」를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일으키고 키운 연구소에 집착하지 않고 때가 되면 늘 자리를 넘겨주셨다』고 회고했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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