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컨 - 회화의 괴물」크리스토프 도미노 지음·성기완 옮김
시공사 발행
살아가면서 자신의 실체를 알아가는 일처럼 끔찍한 것이 있을까_종종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근래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어떤 질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고, 자신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과정의 극악스러움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실체를 알고 싶지 않다는 심리의 배면에는 삶에는 얼마간의 환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절박한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신비평과 구조주의시대 이후 문학도 시도 예술도 과학을 닮아가면서 모두 다 실체, 텍스트 그 자체, 상호텍스트성이라고 부르는 원천 찾기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아,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도취할 그 무엇이 왜소해지고 상실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구상화가라 지칭되는 프란시스 베이컨. 바야흐로 세기말이므로 이런 평가가 성급하지 않으리라고 믿어진다. 독학으로 배운 그림에서 이 정도의 능력을 발휘한 걸 보면 과연 예술에 있어서 천재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증할 수 있을듯하다. 그의 못보던 그림까지를 포함한 아담한 사이즈의 이 책 한 권은 꽤 오랫동안 나를 즐겁게 했다. 그 즐거움의 몇 가지들. 무엇보다도 이 책에는 풍성한 도판이 실려 있다. 굴절되고 변형되고 생략된 초상화들이 연작 형태로 나란히 실려있는 것은 꽤 정성들인 편집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림을 그릴 때의 화가의 심정에 가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화가의 삶과 그림을 한 공간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비단 이 책만의 아이디어는 아니겠으나 화가의 삶에 대한 갈증을 잘 해소시켜 준 배열로 「작은 책, 많은 정보」를 만족시켜준다.
베이컨은 우리 존재를 속박받는 피조물로 보았다. 그래서 교황도 그리고 십자가상도 그리고 또 외설물에 가까운 성애 그림도 그렸다. 나는 그 속에서 환상이 거세된 또 다른 환상을 본다. 그 환상은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모습이 너무 많이 일그러져 있어 나는 가슴이 아프다.
정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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