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째 뇌졸중 투병 운보 김기창화백 인터뷰 -95년 뇌졸중으로 붓을 놓은지 5년째인 김기창(金基昶·86) 화백을 만난 것은 화가 운보(雲甫)의 작품세계를 취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청각장애라는 역경을 딛고 치열하게 살아온 한 예술가의 말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알고 싶어서였다.
11일 오후 충북 청원군 북일면 「운보의 집」. 높고 큰 솟을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몇번 문을 두드리자 그의 집 바로 옆에 있는 운보공방에서 한 남자가 뛰어와 재빠른 솜씨로 빗장을 열었다. 아담한 뜰과 연못이 고색창연한 고택과 함께 한 눈에 들어왔다.
대청마루에 올라 대나무 발을 걷어올리자 안방 휠체어에 꼿꼿이 앉아있는 운보. 눈이 마주쳤다. 몇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그는 봉걸레를 휘두르며 그림 그리던 예전의 운보는 물론 아니었다. 오랜 병상생활 탓인지 야윈 모습이었다. 그러나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대가의 위엄이 금세 감지됐다. 계속 침을 흘려 옆에서 닦아주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눈빛은 여전히 빛나고 풍부했다.
길게 기른 흰 머리, 운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빨간 양말, 그리고 새빨간 티셔츠. 그는 원색을 여전히 멋스럽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병원용 3단 철제 침대가 놓인 한 쪽 벽엔 손자들이 연필로 그린 할아버지 얼굴이 붙어 있고 또 한 쪽엔 대형 프로젝션 TV와 수십개가 넘는 비디오가 쌓여 있다. 운보를 돌보는 사람들은 「잃어버린 세계」 「풍운」이 요즘 그가 즐겨 보는 비디오라고 말해줬다. (무협영화를 특히 즐기는 그는 소리는 듣지 못해도 「감」으로 이해한다고 한다.)
동행했던 최병식(崔炳植) 경희대 미술교육과 교수가 큰 절을 올린 후 그가 쓴 평전소설 「천연기념물이 된 바보」를 내놓았다. 운보는 제목을 손으로 가리키며 아주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짝 감은 그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펜으로 질문하면 그는 말로 대답했다. 운보는 「그림」과 관련된 질문엔 아예 입을 꽉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고, 일부러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바보」 「우향」(雨鄕·운보의 아내 박래현·朴崍賢·76년 사망) 「이당」 「어머니」 「하나님」이란 단어엔 놀라우리만치 열심히 반응했다. 안타까운, 때론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는 적극적으로 「말」했다. 무언가 잘 통하지 않는 것 같으면 수화를 섞어가며 자신의 뜻을 전했다.
_오래 오래 사세요.
『하늘나라 갈 때면 가야지. 어젯밤 꿈에서 하나님 만났어. 그만 살고 빨리 오라고 하더군. 1년 이상 더 살았으니』(한달에 한번씩 그는 서울에 올라가 삼성의료원에서 심장병 치료를 받고 있다)
_빨간색이 참 잘 어울리십니다.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 올리며 좋아하면서) 『빨강은 정열적인 색이지. 내가 입고 있는 이 색은 일장기 빨강색 하고는 달라』
_어머니(32년 사망)와 우향이 그리우시지요.
『눈 감으면 꿈에서 때때로 보이지. 싸우는 것, 잔소리 하던 것이 생각나. 나는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제일 소중히 생각해. 어머니의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어. 너무 오래 살지 말고 빨리 자기 앞으로 와 편하게 지내라고 하셔. 죽는다는 것 무섭지 않아』(운보는 화가인 우향과의 사이에 현(52) 완(50) 선(47) 영(43)씨 등 1남3녀를 두었다)
_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선생님 생각나세요.
(그는 갑자기 모자를 벗었다. 존경심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는 열일곱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당대 최고 화가인 이당의 문하생이 됐다) 『이당은 내 아버지같은 분이지. 진짜 좋아해. 어렸을 때 살던 운니동 집에 가보고 싶어』
_붓을 다시 잡고 싶으시지요.
(그는 대답 대신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_어떤 작품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십니까. 「바보」(바보 산수)란 무슨 뜻입니까.
(자신의 앞에 걸린 그림을 아무거나 가리켜 좌중이 웃자) 『무엇이 좋고 나쁜 게 없다. 다 좋지. 바보는 초월했다는 뜻이야. 그냥 그대로의 모습이지』
더이상 인터뷰가 되지 않았다. 그는 가끔씩 치매증상을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심신이 쇠약해가도 운보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분명히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와 아내, 스승, 하나님에 대한 것들이었다.
/송영주기자 yjsong@ 원유헌기자 youhoney@hk.co.kr
*민화의 정신변형 '바보산수' 대표적
구상과 추상, 동양화와 서양화를 넘나들며 변신을 거듭해온 운보는 엄청난 다(多)작가이다. 드로잉까지 합치면 무려 10만장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대표작은 76년부터 본격화한 민화의 정신을 변형한 「바보산수」와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자연으로 돌아간 「청록산수」.
미추(美醜)를 초월해 무위적 상태에서 표현되는 바보산수엔 늘 유머와 능청스러움이 뒤엉켜있다. 운보는 『바보란 덜 된 것이며, 예술은 끝이 없으니, 완성한 예술은 없다. 그래서 바보산수를 그린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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