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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누구의 주도로 전쟁 일어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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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누구의 주도로 전쟁 일어났나

입력
1999.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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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누구의 주도로 일어났는가.남한 국민에겐 당연히 김일성이 답인 듯 싶지만 이 문제는 아직 학계에선 풀리지 않은 과제이다. 이 문제에 앞서 학계에선 한국전쟁 발발 원인이 논쟁거리였다.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학설은 50년대부터 대립해온 두 입장. 전자는 북한의 남침을, 후자는 북침 혹은 미국·남한의 남침 유도를 한국전쟁 원인으로 꼽았다. 다수 학자들이 참여한 전통주의 학설에 반기를 든 수정주의의 대표적 학자는 「한국전쟁의 기원」(81년)을 쓴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였다.

그러나 이 논쟁은 90년대 들어 구 소련 비밀 문서가 공개되면서 빛을 바래가고 있다. 50년초 스탈린_김일성 회담록 등 속속 공개되는 비밀문서들은 한국전쟁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제 학계의 관심은 김일성과 스탈린 중 누가 전쟁 발발을 주도했느냐에 쏠려 있다. 아직 정답은 없다. 학계 입장은 스탈린주도론, 김일성주도론, 김일성·스탈린 공조론으로 나뉘어 있다.

▦스탈린 주도론

미국과의 대결, 미·일공조 견제, 미·중간 갈등 유발을 위해 스탈린이 전쟁을 입안하고, 김일성은 그 하수인으로 전쟁을 했다. 북한의 정권 성립은 물론 군사력 증강까지 북한 체제 운영의 거의 모든 부분이 소련에 의해 지원됐다. 또 김일성은 개전을 위해 스탈린의 동의를 두 차례나 간청해야 했고, 소련 당국은 49년 10월 38선상에서 일어난 대규모 「국경분쟁」당시 더이상 도발하지 못하도록 북한을 제지했다.

▦김일성 주도론

김일성은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소련의 내락을 받지 않거나 약속을 어기고 개전을 감행했다. 한국전쟁은 소련이 지원한 「북한 주도」의 남침으로, 49년 5월 38선 충돌로 시작된 유격전과 국지전의 확산된 형태에 불과했다. 김일성은 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시 「국토 완정론(完征論)」을 제시하며 「급진 군사주의」를 확산시키고 50년초 개전을 결정, 스탈린과 마오쩌뚱에게 사후 동의만을 받았다.

▦김일성 스탈린 공조론

어느 한 쪽이 아닌, 김일성_스탈린의 공조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개전결정 과정은 다단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공조가 결정적이었다. 50년 4월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에서는 일단 스탈린이 개전에 동의하면서 김일성에게 마오쩌뚱의 추가 동의를 받아오라 요구한다. 그 해 5월의 마오쩌뚱과 김일성의 회담에서 마오쩌뚱은 적극적인 동의 의사를 밝힌다. 3단계로 이뤄진 회담 과정에서 김일성과 스탈린이 부정적 의사를 밝혔을 경우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사봉기자 ses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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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과 휴전체제 성립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한국전쟁은 6.25 사변, 6.25 동란이라고도 하고 북에서는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으로 불리운다. 전쟁의 초기 양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은 북한의 전면전 도발로 시작됐다.

그러나 48년 남북한 분단정부 수립 이후 빈발했던 접경지역 분쟁 등 당시의 혼란상으로 말미암아 개전자(開戰者) 문제에 대한 논란이 상당 기간 있었다. 북한은 개전 직후 사전 각본에 따른 남한의 38선 침범에 대응, 역습을 전개했다고 주장했고, 그 뒤 북침 의혹의 근거로 경무대에서 노획한 전쟁 직전의 이승만 서한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서방에서도 50년대부터 스토운(I. Stone) 등은 전쟁 발발 과정의 의혹을 제시했고, 60년대 이후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냉전이 촉발·확대됐다고 보는 수정주의학자들은 미국의 책략에 북한이 말려들어 전쟁이 일어났다는 이른바 「남침 유도설」을 제기했다. 80년대초 미국의 커밍스(B. Cumings)는 전쟁의 기원 문제를 제기하면서 거시적 역사해석을 제시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사회혁명 추세를 해방후 미국이 의도적으로 반전시키면서 촉발된 사건이며, 이 점에서 개전자가 누구이든 역사적 책임은 미국과 이를 추종한 세력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전쟁의 역사성을 극명하게 부각시킨 것이었지만, 커밍스의 이념적 편향성과 부적절한 사료 취급, 전쟁기원 논의를 전쟁 자체와 기계적으로 결합했다는 한계가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 과정에 대한 결정적 증거는 탈냉전과 함께 제시됐다. 구소련의 역사 재해석 작업이 러시아에 의해 계승되면서 1940년대 소련의 동북아정책과 관련한 외교문서들이 발굴·공개됐고, 94년에 러시아 정부는 문서 발췌본을 한국 정부에 공식 제공했다. 이 문서들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발발은 49년부터 거듭된 김일성의 도발 제의를 50년초에 스탈린이 수락하고 모택동 또한 이를 수용함으로써 가능했다. 결국 전쟁은 전 한반도의 사회주의화를 앞당기려는 김일성의 정치적 의지와 세계 공산화에 이를 활용하려는 스탈린의 전략에 따라 선택된 것이었다.

▦미국의 참전과 전쟁 확대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뚱(毛澤東)의 합의에 따라 전쟁이 계획되고 이를 위해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대해 대규모 인적·물적 지원을 제공했다는 점은 한국전쟁이 발발 당시부터 사실상 국제전이었음을 의미한다. 북한은 내전(內戰)으로 위장하려고 노력했으나, 당시의 국제정세에서 이는 소용이 없었다. 미국은 개전 당시부터 「직감적으로」이 전쟁이 소련에 의한 대리전이라고 결론짓고 유엔안보리 결정을 주도함과 아울러 직접 개입을 서둘렀다.

미국은 이미 군수지원과 해·공군 지원에 이어 50년 6월 30일 지상군 파견을 결정했다. 미국은 7월 7일 유엔 안보리의 통합사령부 설치 결의에 따라 유엔 참전국의 지휘권을 장악한 데 이어 7월 16일에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도 인수해서 이 전쟁을 자국 주도로 끌고 나갔다. 전쟁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유엔의 경찰행동이라는 점에서 명실상부하게 국제화된다.

50년 9월 15일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황이 급반전되고 38선 돌파가 임박하면서 북한 점령 문제를 둘러싸고 한·미간 극심한 대립이 있었다. 한국은 북한이 영토의 일부이므로 한국정부에 자동 귀속된다고 본 반면 미국은 일단 유엔군사령관에 의한 점령 통치후 북한내 총선거를 거쳐 한국 정부에 관할권을 이양하는 방안을 수립했다. 미국의 점령 방안은 한국 정부의 유일 합법성을 제한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이 전쟁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그대로 관철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개입과 휴전

개전 과정에서 김일성과 스탈린, 모택동 간에 미국이 참전할 경우 중국이 개입한다는 사실은 이미 결정돼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국의 참전 여부가 불투명했고 중국의 약속도 그 규모나 범위가 모호한 것이었다. 결국 50년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은 북상하는 미군의 만주 공격 위협으로부터 비롯되는 중국의 우려와 더불어 김일성과 스탈린의 약속 이행 촉구 및 모택동의 이행 결정을 통해 어렵사리 이루어졌다.

중국이 참전하면서 한국전쟁은 아시아 공산국가와 서방 자유진영간의 전쟁으로 그 성격이 다시 한번 반전한다. 한반도 상황은 중국의 인해전술과 미국의 군사력이 미묘한 균형점을 찾으면서 전쟁은 장기화된다. 51년 1월의 1.4 후퇴와 그 해 3월의 서울 재수복 이후 재래식 군사력으로 상대편을 압도하지 못하는 쌍방의 힘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결국 전황은 38선을 접점으로 교착상태에 빠진다. 51년 7월부터 진행된 2년 동안의 휴전 협상은 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휴전으로 전쟁이 당초 목적인 한반도 통일을 완결짓지 못하고 끝났지만, 장기간의 휴전 협상 과정은 또다른 결과를 낳았다. 당시 휴전에 반대하던 한국 정부는 휴전을 할 경우 한국군의 유엔군 지휘권 이탈을 위협했고, 이에 대해 국내 여론 때문에 종전을 서두르던 미국은 한국에 대해 반대 급부 제공을 검토하게 된다. 이로써 종전후 전쟁재발시 재참전 선언 정도를 하려던 미국의 당초 계획이 변경되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의한 동맹이 체결되며 주한미군도 무기한 주둔하게 됐다.

▦전쟁의 영향

한국전쟁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유럽에서 시작돼 격화일로에 있던 미·소 냉전이 아시아 지역으로 비화되어 세계적 냉전구조로 구축됐다. 미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군비증강을 가속화했고 「힘을 통한 억제」 전략은 결국 공산 체제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원동력이 됐다. 남북한 쌍방도 이 전쟁을 통해 한 쪽은 미국 중심 체제, 다른 한 쪽은 소련과 중국 중심 체제로 완벽하게 편입됐다.

한국전쟁은 국내적으로 엄청난 물적·인적 피해를 남겼다. 남북한을 합쳐 200만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됐고 부상자까지 합하면 500만명이 넘었으며, 1,000만명에 달하는 이산가족을 낳았다. 이 살육과 파괴의 전쟁은 역설적으로 남북한 분단구조 구축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전쟁 이전에는 불완전하고 「미력한」남북한 분단 정부는 전쟁동안 극적으로 강화됐다. 전쟁은 남북한 양쪽에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과 자기 편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인력의 재배치를 낳았고, 전쟁 과정동안 극도로 팽창한 국가기구는 각각의 국내 자원을 총동원하면서 생활의 모든 면을 통제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과 김일성은 정권의 공고화까지 이룰 수 있었다.

결국 전쟁은 45년부터 시작된 분단 과정의 「마침표」였다. 남쪽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북측 공산주의 세력의 파상적이고도 역동적인 공세가 일단락되면서 장기간의 안정적 공존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었다.

/서주석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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