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김수근(1931~86)은 「건축은 예술」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젖힌 대가다. 그의 예술혼에 취해 젊고 유능한 「건축쟁이」들이 기꺼이 수하로 들어갔고 청춘을 바쳐 「건축이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아 씨름했다. 어느새 한국 건축계에 최고의 반열에 올라선 이들은 이제 「김수근의 21세기적 해석」이라는 난해한 과제에 당차게 도전하고 있다.김수근은 경기중 2학년때 영어회화를 가르쳤던 미군병사의 영향으로 건축에 눈을 뜬 뒤 서울대 건축과에 진학했다. 대학 2학년이었던 51년 그는 돌연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밀항, 도쿄(東京)예대 건축과와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60년 귀국한 그는 남산국회의사당 설계공모에서 1등으로 당선, 단번에 주목받는 건축가로 떠올랐다. 그는 당시 권력의 2인자였던 김종필 현총리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워커힐 힐탑바(61년), 부여박물관(67년), 오사카(大阪)엑스포 한국관(70년), 건축사무소 「공간」 사옥(71년), 잠실 올림픽주경기장(77년) 등 걸작을 창조해냈다.
한양대 건축공학과 정인하 교수에 따르면 김수근후학들은 자신이 함께 일했던 시기의 김수근과 상당한 정도의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김수근이 61, 68, 69년 설립한 김수근건축사사무소,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인간환경계획연구소에서 함께 일했던 윤승중(원도시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 유걸(유걸건축연구소 대표) 김원(광장건축사사무소 대표) 김석철(종합건축사「아키반」대표)씨 등이 1세대 4인방이다. 이들은 건축을 목수의 일에서 고도의 예술행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던 60년대 김수근의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런 영향은 윤씨와 유씨에게서는 재료와 구조를 과감하게 노출시키는 테크놀로지적 경향으로, 두 김씨에게서는 조형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윤씨의 대표작인 성균관대 수원캠퍼스과 청주공항 대법원청사, 유씨의 밀알교회와 강변교회, 김원씨의 국립국악당과 광주가톨릭대, 김석철씨의 예술의전당과 명보극장 등은 이런 각자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성장한 이들 1세대가 추구했던 고도의 예술성이 지극히 서구적인 사고에서 출발했다면 71년 출범한 공간에서 김수근과 함께 작업한 2세대 후학들은 한국적 예술성의 구현에 초점을 뒀다. 이는 공간을 한옥의 이미지로 꾸미고 검정과 빨강벽돌 등 토속적 소재를 사용했던 70년대 김수근의 활동과 맞닿아 있다. 2세대의 대표주자는 오기수(吳基守·스페이스오건축연구소 대표·대표작 청도농기구박물관) 김원석(시원건축사사무소 대표·대표작 서울 강북구 미아동 자택 「아리장」) 민현식(기오헌건축연구소 고문·대표작 국립국악고) 류춘수(이공건축사사무소 대표·대표작 상암동 월드컵주경기장) 김남현(월드컵주경기장 건설사업관리단장) 우시용(시공건축연구소 대표) 신언학(토우건축사사무소 대표) 승효상(이로재건축사사무소 대표) 등이다. 이 시기 공간을 거쳐 학계로 들어간 단국대 건축공학과 이범재, 국민대 건축과 박길룡 서상우교수도 이들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70년대말부터 80년대초 사이에 공간에 들어간 3세대는 한국성의 굴레로부터 해방돼 다양한 실험적 시도와 강한 자의식의 표현을 통해 예술성을 극대화하려 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들이 김수근과 무관하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건축의 예술화라는 철학적 기초를 중시, 김수근후학으로 보고 있다. 3세대 가운데서는 공간에서 소장급으로 있는 정종영 이상림 오섬훈씨, 바른손사옥을 공동설계한 이종호(메타건축사사무소 대표) 양남철(양남철건축연구소 대표) 등이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은호기자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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