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가에서 문고판이 사랑받던 때가 있었다. 작가 장정일이 「독서일기」속에서 청소년기에 늘 끼고 다니며 읽었다고 때때로 언급하던 「삼중당 문고」시절(70년대 후반)쯤이었을 것이다. 같은 문화권이면서 사회 제도나 생활 방식도 크게 다르지않은 일본에선 문고판 서적의 인기가 여전하다. 하지만 우리는?범우사를 비롯해 몇 개 문고가 명맥을 잇곤 있지만 그 책들이 꾸준히 잘 팔린다고, 값 싸고 질 높은 책을 우리는 아직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고판 서적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지하철에서 쉽게 빼들고 읽는 사람을 만나기도 이젠 보기 힘든 풍경이다.
시공사에서 펴내는 디스커버리 총서가 최근 100권째 책(「책의 역사」)을 냈다. 프랑스의 저명한 출판사 「갈리마르」가 21세기를 앞두고 인류의 문화 유산을 종합·정리하는 뜻으로 86년부터 펴내고 있는 「데쿠베르(Decouvertes·발견)」를 번역해 소개하는 문고판 시리즈. 이 책은 문고판 시장에서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 외에도 국내 출판시장에서 문고판 개념을 크게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디스커버리 총서는 처음 1차분 7권을 발간한지 석달만에 재판에 들어가, 100권을 낸 현재 권당 평균 1만∼2만부씩의 판매기록을 올렸다. 특히 「반 고흐_태양의 화가」는 모두 11차례 판을 찍어 3만권 넘게 팔렸다.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폼페이 최후의 날」 「영화의 탄생」 「인류의 기원_화석인류를 찾아서」 「기호의 언어」 「정교한 상징의 세계」 「하늘의 신화와 별자리의 전설」 「클레오파트라_파라오의 사랑과 야망」등도 2만 5,000∼3만 권 가량 팔려 나간 베스트셀러 겸 스테디셀러다.
디스커버리 총서의 이같은 성공 이유는? 국내 문고판의 틀을 깨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그림과 사진을 글 못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전지면을 컬러로 편집한 것은 문고판 시장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다. 다루는 분야도 문화사 미술 음악 철학 과학 종교 등 인류의 지식을 망라하고 있다. 영상 세대에 맞는 문화입문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권당 6,000원으로 문고판 치고는 꽤 비싼 데도 책이 잘 팔리는 비결이다. 디스커버리 총서를 보면서 문고판의 지리멸렬은 오로지 독자들의 무관심때문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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