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 -50년 실시된 한국의 농지개혁이 성공인가 실패인가라는 논란이 있지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농민이 요구한 내용이나 농지개혁 후 농민의 빈곤해방을 기준으로 한다면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너무나 주관적인 기준이다.
지주계급의 타파와 소작농의 자작농화가 어느 정도 철저했는가라는 역사적이고 보편적 기준에 의해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농지개혁의 배경- 북한의 토지개혁과 미국의 대한정책
한국은 대만과 함께 다른 후진국들에 비해 농지개혁이 비교적 철저하게 시행된 나라이다. 여기에는 북한의 토지개혁과 미국의 한반도 안정요구가 함께 작용했다. 46년 3월 실시된 북한의 토지개혁은 체제경쟁을 강요했고, 비등하던 농민들의 토지개혁 투쟁에 대처하여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농지개혁이 불가피했다.
또 미국은 점령초기에는 동맹세력으로서 지주계급을 보호했지만 장기적으로 한국을 자본주의국가로 안정시켜 군사기지로 활용할 의도로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따랐고, 또 당시 지주계급을 기반으로 하고 자신의 정치적 경쟁대상이었던 한민당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농지개혁 실시를 추진했다.
당시 필리핀, 남베트남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내전상황으로 반공이 초미의 과제였지만 토지개혁을 실시하지 못했던 것에 비춰봐서 한국의 농지개혁은 후진국 중에서도 특별히 실시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농지개혁의 내용 - 지주계급의 몰락과 농민의 자작농화
45년 해방 당시 소작지는 144만7,000정보였는데 그중 58만5,000정보가 분배됐고, 나머지 소작지중 45년말에서 50년 3월까지 71만여정보가 지주에 의해 소작인들에게 방매됐다. 농지개혁에 의한 분배면적보다 더많은 농지가 사전방매로 소작지에서 자작지로 전환된 것이다. 방매가격은 농지개혁에 의한 상환가격에 비해 농민들에게 크게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계급은 일소됐다. 60년 농업센서스에서는 소작지 비율이 11.9%로 25만여정보로 축소됐고, 그 중 8만여정보는 위토(位土) 등 합법적 소작지였다. 50년대 이후의 지주는 계급으로서의 지주는 아니었다.
분배받은 농민의 토지댓가 상환조건은 평년작 주작물 생산물의 15할을 5년간 3할씩 분할상환하는 것이었다. 54년말까지의 법정상환기간중 상환된 것은 68%에 불과했는데 납부지연의 이유로 분배가 취소되지는 않고 상환기간이 계속 연장됐다. 농지개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소작농들은 자작농이 됐다.
◆한국 농지개혁의 성격 - 부르주아적 농지개혁
한국 농지개혁의 성격은 부르주아적 농지개혁으로서 이것은 서구 시민혁명 당시 토지혁명의 내용이 일부 소작지의 유상 분배였던 것에 비한다면 급진적이었고, 당시 농민이 주장하던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에 비춰보면 철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무상분배방식의 인민민주주의적 토지개혁은 분배받은 농지에 대한 농민의 소유권 행사가 부자유스러웠고, 고율의 현물세를 부담해야 했으며, 그 뒤 곧 농업집단화가 진행돼 실질적인 토지국유화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농민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의 농지개혁보다 더 나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농지개혁의 의의 - 60, 70년대 급속한 경제발전의 결정적 요인
농지개혁은 60·70년대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을 조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 즉 국가주도에 의한 수출주도 공업화정책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러한 정책이 다른 후진국에서도 추진됐던 점을 고려하면 한국이나 대만의 60년대 당시 조건이 경제발전에 특별히 유리했다고 할 수 있고, 여기에 농지개혁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첫째, 농지개혁은 지주계급을 몰락시킨 대신 신흥자본가계급의 창출을 촉진했다. 소유토지를 매수당한 지주들은 보상기준인 법정곡가가 시가의 절반에 불과하여 지주들은 손해를 본데다가 법정 보상만료기간인 54년까지 절반 밖에 보상못할 정도로 보상이 지연됨에 따라 인플레에 의한 손해를 입었다.
여기에 지가증권을 액면가격의 25% 내지 70%로 미리 매각한 결과 지주들이 실제로 보상받은 금액은 명목보상금액의 10%에 불과했다. 지주들은 이승만이 땅을 거져 뺏아갔다고 저주했다. 지주에게 지급된 보상총액 중 54%가 귀속재산 불하에 동원됐다.
일반지가증권으로 귀속 재산 매입에 동원된 금액은 귀속사업체 재산평가액의 43%에 달한다. 지주로부터 귀속재산을 실질매입가격의 10%라는 헐값으로 매입한 결과 신흥자본가급, 즉 재벌이 형성됐고, 재벌은 60년대 이후 공업화의 주역이 되었다.
둘째, 농지개혁으로 자작농이 된 농민들이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고, 이들이 경제발전과정에서 우수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풍부하게 공급했다. 60년부터 75년까지 약 700만명, 연평균 45만명의 젊은 인력이 농촌에서 유출됐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관리직으로, 중고교를 나온 사람들은 생산직, 사무직, 판매직으로 일했다. 이들이야말로 경제발전을 피땀으로 뒷받침한 산업전사들이었고, 이들의 저임금·장시간노동 위에서 재벌들이 성장해간 것이다.
농지개혁은 중세적, 봉건적 질서를 타파하고 한국이 근대적 자본주의사회로 발전하는데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적으로는 청산됐지만 실제로 지주소작관계를 기반으로 잔존해왔던 전근대적인 신분제, 주종관계도 청산됐다.
오늘날 재벌이나 금융자본 등이 한국경제를 누르고 있는 현실에서 농지개혁이라는 기생적 세력의 청산이 경제사회 발전에 지니는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농지개혁일정
▲49년 6월21일 농지개혁법 공포
▲50년 약간의 수정을 가해 대통령령 제295호 발표, 시행. 6.25전쟁으로 중단.
▲51년 4월28일 농림부령 18호 농지개혁법 시행 규정으로 남한 전역에서 실시.
■연구자료
「농지개혁과 식민지 지주제의 해체」(박석두·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농지개혁사 연구」(김성호 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한국근대 농촌사회의 변동과 지주층」(홍성찬, 지식산업사)
「좌절된 사회혁명」(강정구, 열음사)
「미군정의 농민정책에 관한 연구」(최봉대, 서울대박사학위논문)
「농지개혁과 식민지 지주제의 해체」(장상환, 해방전후사의인식2)
■장상환 蔣尙煥·경상대 교수·농업경제학및 한국경제사
약력
△51년 대구 출생 △연세대 경제학과에서 「한국의 농지 문제와 농지 정책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90~93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소장 △저서 「한국농업농민문제연구 1」 「제국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사회의 이해」 「한국경제론강의」 「한국의 농업정책」 논문 「농지개혁과정에 관한 실증적 연구」 「농지개혁과 한국자본주의의 발전」 「1990년대 한국자본주의의 구조변화」 「재벌해체와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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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주들 어떻게 변모했나
50년 농지개혁은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토지를 돌려주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지켰다. 지주와 소작농으로 구성돼온 봉건적 토지소유가 무너지고 농민에 의한, 농민의 토지소유가 확립됐다.
생활 근거를 농촌에 두지 않았던 부재 지주는 모든 소유지를 잃어버렸고 농촌의 지주들도 직접 농지를 경작하는 자작농으로 변모했다. 우리나라에서 지주라는 계급은 50년 농지개혁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졌다는게 정설이다.
그러면 농지개혁의 소용돌이를 겪은 대지주들은 어떻게 변모해갔는가. 그 많던 천석꾼, 만석꾼들이 농지개혁과 산업화를 거치며 무기력하게 해체됐다고 볼 수 있을까. 50년대 상당수 지주들은 산업자본가로 변신을 모색했다. 요즘 재벌로 불리는 자본가들중 일부는 농지개혁 이전, 대지주로서 떵떵거리던 사람들도 있다.
대지주 출신의 대자본가가 이룬 대표적 기업은 삼양사(회장 김상하·金相厦). 삼양사는 섬유·설탕 주력그룹으로 80년들어 업종전환을 하지 않아서 업계후선으로 밀리다 최근 30대 그룹에 급부상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그룹.
전북 고창 출신으로 호남 최대의 대지주로 꼽히는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는 1919년 경성방직회사를 창설했고, 그의 동생인 김연수(金秊洙·1896~1979)는 1931년 구 삼수사(三水社)를 삼양사로 개칭, 염업 제당 제빙 방적업 등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현재 회장은 김연수의 아들. 부모의 토지자본을 기반으로 산업자본을 일으킨 전형적 사례다. 농지개혁을 전후로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이전시킨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국내 최대재벌인 삼성과 LG그룹은 소지주 집안 출신으로 가산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생적으로 성장한 케이스. 농지 개혁 직후인 50년 당시 최대 재벌로 꼽혔던 삼성 이병철(李秉喆·1910~1987)회장의 경우 경남 의령의 연 1,000석 규모 소지주였던 부친으로부터 300석 규모의 토지를 물려받아 독자적으로 1938년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했다.
지주였던 집안의 도움에 힘입어 산업자본가로 변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LG그룹의 전신인 락희(樂喜)산업주식회사를 이끌었던 구인회(具仁會·1907~1969)회장의 경우도 부친의 사촌형으로부터 포목상을 차리는 정도의 도움을 받아 독자적으로 사업을 일으켰다.
한국의 대표적 대자본가들은 대지주, 혹은 소지주라는 든든한 뒷배경을 근거로 성장했지만 지주계급 자체는 한국사회의 주류에서 완전히 탈락한 것으로 분석된다. 50년대 대자본가로 불리던 사람들중 아버지가 지주였던 경우는 대략 20%안팎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 경우도 삼양사처럼 일제시대 중반부터 상업자본의 성격을 조금씩 갖추어가고 이후 다시 방적업등 산업자본으로 변신해가는 사례는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나마 부모가 지주인 경우도 대개 토지자산의 일부를 물려 받았을 뿐이고 이후 사업확장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자수성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농지개혁은 한국의 지배계급 구조를 완전히 단절시킨 일대 역사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물론 구조가 바뀐 데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급변한 특수성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지만 농지개혁이 갖는 의미를 가볍게 하는 것은 아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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