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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설의 한순간] 은희경 '여름은 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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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설의 한순간] 은희경 '여름은 길지 않다'

입력
1999.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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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에 실린 소설 가운데 「여름은 길지 않다」는 단편은 내가 신촌의 한 원 룸을 작업실로 쓰고 있을 때 씌어졌다. 그때 나는 책을 뒤적이거나 소파에 눕거나 비디오테이프를 데크에 밀어넣다가 문득문득 어딘가의 방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소리, 웃음소리를 듣곤 했다. 그것은 하나의 공동주택 안에 각자 조그만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단절된 채 존재하는 개인적인 삶의 기척이었다. 그 익명성과 단절 속에서 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나의 삶이 마치 매스게임처럼 신호에 맞춰 일제히 주어진 색깔을 쳐듦으로써 거대한 그림의 한 귀퉁이로 존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그 무렵은 처음 통신을 익혔던 터라 통신공간을 자주 기웃거렸다. 몇번인가 채팅을 해 본 기억도 있는데, 스스로를 백수라고 소개한 한 청년과의 대화는 퍽 인상적이었다. 그는 존 파울즈를 좋아하고 랭보처럼 동성애적인 성향이 있다고 고백했다. 하루종일 하는 일이라곤 비디오를 보고 통신을 하고 라면을 끓여먹는 일이 전부라는 거였다. 마음이 내키면 남한산성에 가서 몇시간이고 물끄러미 서울을 내려다보는 게 취미라면 취미였다고 했다.

바로 그날 저녁이었던 것 같다. 십년 전 직장동료였던 남자친구 둘을 몇년만에 만났다. 취기가 돌자 그들은 찬 바람이 살을 찢는듯한 한겨울에 한강 모래밭으로, 소래포구로 카메라를 메고 함께 쏘다니던 시절을 얘기했다. 서로의 실연을 술과 토악질로 위로하던 20대, 마스크 하나를 번갈아 써가며 뛰어다니던 매운 시청거리. 그러나 지금은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와있었다. 직장에서 쫓겨났고 결혼독촉에 시달리고 주머니에 돈이 적다는 사실로 벌써 기운이 없었다. 이제 그들이 서있는 곳은 밤 바닷가가 아니라 생존경쟁 대오였다. 내가 위로했다. 『사자는 일년에 삼백오십 마리의 얼룩말을 잡아먹지 않으면 굶어죽는대. 동물의 왕도 목숨 부지하기가 만만찮은 일인데 뭐』 그들과 헤어져 교보문고 앞으로 걸어나오는데 한 순간 커다란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개미처럼 모아라. 여름은 길지 않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보면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죠. 회색 매연의 띠로 겹겹이 덮인 하늘 아래 힘차게 서있는 아름다운 고층빌딩 숲과 아파트 단지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려고 해요. 흘려버리기는 아까워서 눈 속에 담고 있는데, 화려한 행글라이더가 서서히 내려와서는 그 눈물 위로 어리는 거예요』

열심히 산다는 것은 눈물나는 일이다. 발전적인 것, 미래지향, 새 천년, 자기개발, 사회화, 선진국 진입, 여가선용_이 모든 아름답고 씩씩한 말들 또한 얼마나 눈물나는 말인지. 과연 우리 삶에 진지함이란 무엇일까. 건실함이란? 치열함이란? 그리고 대한 건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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