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식 단죄론(斷罪論)에 밀려 희생양을 만들지는 않는다』김태정(金泰政)법무장관을 유임시키면서 대통령이 던진 말이다. 일부 국민은 놀란 나머지 『비서(秘書)의 비자마저 모르는 실장과 수석이 두터운 「인의 장막」을 치고 정보를 차단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바닥 민심을 읽지 못한다』고 진단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모르는 소리이다. 이제는 신문을 훑어보기만 하면 「민심」이 느껴지는 세상이다. 게다가 6·3재선에서 참패한 원인은 「옷 사건」이고 『당은 책임없다』고 말하면서 국민회의 수뇌부에 대한 문책론을 일거에 잠재운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녀사냥에 굴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김대중대통령은 잘 짜여진 논리체계로 득과 실을 따져보면서 한 수 한 수를 신중히 놓는 정치인이다. 「원칙론」을 고수한 대가가 재선참패라면 그를 능가하는 득이 있다. 무엇인가.
김대중대통령은 이미 작년에 DJ식 인사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바 있다. DJP 연대가 야당에 의한 총리인준 거부로 그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리자 대통령은 퇴임하는 고건(高建)총리의 「제청」을 받아 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를 서리로 임명하고 사정(司正)에 나서면서 여소야대(與小野大)를 종식시켰다. 한편에서는 자기 사람을 철저히 챙기고 다른 한편에서는 타정파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는 공격형 정치인인 것이다.
상황이 이제는 많이 달라졌지만 인사 스타일은 여전히 동일하고 목적 역시 같다. 대통령이 재선 참패의 위험성까지 불사하면서 일개 장관을 지켜준 것은 「원칙」이라기 보다 「권력」때문이다.
8월이 되면 내각제 담판이 벌어진다. 자민련은 공동정부 탈퇴라는 배수진을 치고 대선공약 이행을 밀어붙일 것이고 한나라당은 여권 내부의 틈새를 더욱 더 벌려 놓기 위한 줄타기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
이처럼 사활이 걸린 담판을 목전에 둔 민감한 시점에 민심을 거스르면서까지 김태정장관을 챙길 때에는 다시 한번 검찰을 지렛대로 삼아 정치를 꾸려나갈 각오가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국민이 놀라워해야 할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김태정장관의 「결정」이다. 내각제 담판이 진흙탕 싸움으로 전락한들 대통령이 다칠 리 없다. 다치면 국가 전체가 흔들리는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반세기에 걸친 민주화투쟁을 통해 견고한 지역적 텃밭을 일구어 놓은 대중적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태정장관은 다르다. 검찰총장직에 오르기 이전에는 청렴한 검사로 평가받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후」에 명함을 내놓지 못할 만큼 상처 투성이의 기피인물로 전락하고 있다.
그는 고위검찰간부진이 「전별금」및 「떡값」 문제로 사퇴하던 지난 2월 이전에 이미 민심을 잃은 상태였다. 그 때 그가 흘린 눈물은 『악어가 먹이를 먹을 때 눈물샘에 자극이 가 나오는 잔인한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놀림까지 당하는 신세였다.
그러다 4월에는 야당이 정치검사로 낙인찍어 국회에서 탄핵하려 하였고 이제는 아내마저 옷 사건에 휘말려 카메라에 쫓기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장관 자리에 앉아 사상 최대의 검찰인사를 진두지휘하고 내각제 담판을 둘러싼 더 깊은 진흙탕 싸움 속으로 자진해서 빨려 들어가려 한다.
아마 다칠대로 다친 그이기에 이제는 「후퇴」할 수 없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인 김태정의 인생은 검찰총장직을 맡을 때부터 더 이상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정치판이 굴러가는 대로 자신을 이리저리 「함부로」 다룰 수 밖에 없는 한국정치의 포로 신세였다.
권력을 꿈꾸는 이른바 386세대가 직시해야 할 점이다. 「판」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한순간의 권력을 좇아 섣불리 「정치」에 나섰다가는 영원히 「정치」를 할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