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생각하기. 기존의 권력 구조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혁명적이다. 그러나 돈많은 독신녀와 몸만 가진 젊은 남성의 관계를 보여준 「육체의 학교」는 기존 연애 영화의 남녀 역할만 바뀌었을 뿐 어떠한 새로운 시도나 관점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도 지루한 방식으로.도미니크(아지벨 위페르)는 파리에서 의상실을 경영하는 중년의 독신여성으로 동성애자 술집에서 젊고 반항적인 켄틴(뱅상 마르띠네즈)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몸으로 사는 대개의 매춘남(賣春男)들이 그렇듯 켄틴은 어지러운 돈관계에 얽혀있다.
도미니크는 그에게 돈을 대신 지불해주고, 그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하려 들지만 켄틴은 반항적으로 행동한다. 켄틴은 도미니크 친구 부부의 딸인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이 영화는 일본의 극우파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1925~70)의 동명 소설을 프랑스 브누아 자코 감독이 파리를 배경으로 옮긴 것. 소설은 전후 남편을 잃은 부유한 일본 여성들이 육체적 쾌락을 위해 젊은 남자들을 돈으로 사서 욕망을 채워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랑스 감독은 역전된 남녀의 관계를 통해 기존 질서의 전도를 꾀했다고 주장하지만 도대체 이런 전도된 관계를 통해 무엇을 파괴하고, 어떤 새로운 진실을 밝혀냈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여자는 하룻밤 자고나서 툭 하면 눈물을 흘릴만큼 사랑에 빠졌다가, 마지막에는 켄틴의 미련을 여지없이 잘라버린다. 지고지순했던 사랑이 막판에는 부르조아 여성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영화가 일본에서 제작돼 수입됐다면 왜색이라고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배우들의 프랑스어로 꾸며진 영화는 「예술성」이라는 지식인적 허위의식으로 포장되고 있다.
기대한 베드신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육체의 학교」는 이러한 허위의식의 근거를 마련해준다. 육체는 없고, 어설픈 학교만 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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