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 대한체육회 회장. 한국체육계의 대부 김운용 회장에게 붙어있는 직함은 엄청나게 많지만 그를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은 「포스트 사마란치」 혹은 「IOC 대권후보」라는 수식어다. 최근 IOC내 반대파인 영미계의 공세로 스캔들에 휘말렸던 그는 국내·외에 포진한 「김운용 맨」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고 12~20일 서울 IOC총회를 기다리고 있다.한국전쟁 당시 학병장교로 군에 들어간 그는 송요찬(80년작고)장군의 부관으로 있다가 5·16직후 송장군이 내각수반이 되자 의전비서관으로 관계에 진출했다. 영어 프랑스어 등 6개국어에 능통하고 미국유학으로 세련된 매너를 지닌 그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큰 관심을 보였다. 유엔·미·영 참사를 거쳐 청와대 경호실 보좌관으로 있던 그에게 「태권도 세계화」라는 특명이 떨어진 것은 71년. 이를 위해 우선 국내 태권도 5대파를 통일해야 했다. 오랫동안 별도의 경기규칙과 교육방법, 승단제도를 운영해온데다 해외 사범파견도 독자적으로 추진해왔기 때문에 통합작업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빅2」였던 청도관과 지도관의 엄운규(현 국기원부원장) 이종우(WTF 부총재)관장이 흔쾌히 통합에 동의하고 나머지 파벌들의 통일에도 앞장섰다. 이후 이들은 국제적인 경기규칙과 신기술의 개발·보급을 도맡았으며 특히 73년 세계태권도연맹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창설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회장에게 70년대가 태권도 세계화의 시기였다면 80년대는 서울올림픽 준비기였다. 86년 IOC위원이 된 그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SLOOC) 부위원장으로 외교적 문제를 총괄했는데 업무를 함께 하던 실무진 가운데 뛰어난 인재가 많았다. 당시 유도선수출신인 장주호(현 대한체육회 부회장)SLOOC경기담당사무차장은 종목별 세계연맹과 경기일정 대진방식 등을 협의하는 일에, 외교관출신인 전상진(全祥振·한국외교협회 고문)국제담당사무차장과 김삼훈(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장)의전실장은 동구권 국가들의 초청에, 경제기획원에서 파견된 김병일(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 오종남(청와대 산업통신비서관)방영권팀 과장은 NBC와의 방영권료 협상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현재도 김회장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있다. 당시 김용래 서울시장도 올림픽이 인연이 돼 지금까지 태권도와 체육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이 시기에는 이건희 삼성그룹회장 등 재계인사들이 종목별 경기연맹의 회장을 맡아 김회장을 지원했다. 이들의 투자 덕분에 우리나라는 서울올림픽 이후 한번도 10위권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90년대 들어서는 경영난에 봉착한 재계인사들이 체육계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대학관계자들이 김회장의 신진인맥을 형성했다. 이상철 한국체육대총장 김상겸 고려대교수 김정행 용인대총장이 대한체육회 부회장, 김종량 한양대총장이 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국제 체육계에서는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최대의 후원세력. 서울올림픽을 동서화합의 제전으로 만들기 위해 함께 뛰면서 공동운명체가 됐다. 프리모 네비올로 국제육상경기연맹회장과 케반 고스퍼(오스트레일리아), 케바 음바예(세네갈) 비탈리 스미르노프(러시아) 등 IOC내 주류인사들이 대부분 그의 편이다. 이은호기자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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