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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가난에 꺾이지 않으려 30년간 쓴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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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가난에 꺾이지 않으려 30년간 쓴 '빈'

입력
1999.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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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노우에 유이치전 -글자(字)가 살아 움직인다. 사람의 모습을 닮은 「字」가 막 앞으로 걸어 나온다. 어깨를 들썩이며, 다리를 올리며….

5~27일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열릴 이노우에 유이치 서울전은 국내 서예 애호가들에게 서예의 새로운 맛을 안겨줄 색다른 전시회다. 일본 서예의 거장 이노우에 유이치(井上有一, 1916~1945)는 한마디로 서(書)의 해방을 선언했던 전위 서예가다. 「서(書)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字)를 쓰는 것이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서예로 언어를 표현했던 작가다.

예술의전당 주최로 마련된 이번 행사엔 유이치의 조(鳥) 월(月) 효(孝) 모(母) 빈(貧) 풍(風) 등 대자서(大字書) 107점를 비롯, 문자 이미지, 유게(遺偈), 콘테 등 평생의 역작 137점이 선보인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중 하나인 「우철」(愚徹)은 최초로 서(書)가 국제미술전(57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선발된 케이스로 세계적 미술평론가 허버드 리드 저서 「현대회화사」에 유일한 일본인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가 일본 현대 서단의 새 지평을 연 작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이유는 서예에 대한 기존인식을 파괴한 혁신적 스타일 때문이다.

유이치 작품의 대명사가 된 일자서(一字書) 「빈(貧)」역시 전통을 던져버리고 새로이 만들어 낸 글자다. 『가난했지만, 가난에 꺾이지 않기 위해』 유이치는 30년에 걸쳐 빈(貧)을 쓰고 또 썼다고 밝히고 있다.

매일 출근하기 전 먹을 갈고 퇴근 후엔 글씨를 썼다(그는 42년 6개월 동안 국민학교 교사와 교장으로 일했다).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쓰기도 하고 순서를 뒤집어 몸통 얼굴 삿갓 순서로 쓰기도 했다.

이러한 실험을 감행하면서 그는 전통적 재료와 도구도 과감히 던져버렸다. 대신 연필이나 콘테, 심지어 대싸리나 말털로 묶어 만든 붓을 이용했다. 수성본드에 탄소가루를 엷게 갈아 본드먹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본드먹은 붓이 지나간 흔적을 선명히 남길 수 있어 작가의 기의 흐름까지도 표출시킬 수 있다고 유이치는 밝히고 있다.

『굵은 말털 붓으로 반은 눈을 감고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기분으로 순식간에 쓴 작품은 마치 추락한 시체와도 같다. 먹물이 뚝뚝 떨어져 있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붓의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는 문자를 쓰는 것이지 「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좋은 선을 그리려고 마음먹은 순간 서는 격을 떨어뜨리게 된다』 『산다는 것은 쓰는 것이다. 물론 글씨를 쓰는 것은 즐겁지 않으며 즐기지도 않는다. 괴로울 뿐이다』 유이치는 전통을 습득하고 그 위에 서구의 방식을 대입, 일본식으로 재창조해낸 현대적 미술가였다는 점에서, 우리 서단에 많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송영주기자 yjsos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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