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장관부인들이 무더기로 얽힌 「옷로비 사건」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상류층」이나 「상류사회」란 말을 함부로 쓴다고 생각했다. 분명한 기준이나 가치판단 없이 그렇게 써온 것이 관행이지만, 여전히 생경한 느낌이다. 돈이나 권력을 잣대로 한다면 크게 잘못된 계층구분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굳이 공자 말씀같은 도덕성 기준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돈과 권력만으로 「상류」로 치부하는데 거부감을 갖는 국민이 많다.■런던 정경대학(LSE)학장을 지낸 독일의 석학 다렌도르프는 저서 「영국론」에서 『진정한 의미의 상류층은 영국에만 남은 제도』라고 말했다. 소득이나 부(富)의 규모로 가르는 상류층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국민적 동의를 받은 사회제도로서는 영국에만 존재한다는 얘기다. 미국같은 이민국가는 애초부터 상류계층이 없었다. 또 우리처럼 봉건사회 몰락과 식민통치·전쟁 등으로 급속한 해체를 거친 사회는 계층도 함께 사라진 평등사회로 분류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우리처럼 계층이동이 활발한 사회도 드물다. 전통사회가 무너진 바탕에 개발연대와 잦은 권력교체를 거치면서 모두가 난무하는 돈과 권력을 좇는 폭주경쟁을 벌여왔다. 그 결과 누구나 신분도약을 노리면서, 누구도 남의 신분상승을 심정으로 수용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 이런 사회가 유독 고위공직자나 부인들에게 절제와 금도(襟度)를 요구하는 것도 우습다. 「노블레스 오블리지」를 떠들지만 「노블레스」 자체가 없는 사회가 아닌가.
■그러면 이대로 갈 것인가. 한가지 제안하자면 「상류층」이란 말을 우리의 용어사전에서 지우는 것이다. 다렌도르프의 말처럼 「진정한 상류층」은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가 지적한 영국 상류층의 특성과 덕목은 이런 것들이다. 「권력이나 권위를 세습했지만 행사하지 않는다」, 「부를 사회에 되돌리고 새로운 축적에 신경쓰지 않는다」, 「공직에는 봉사하기 위해 나간다」, 「자선과 자원봉사에 앞장선다」, 그리고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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