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를 찾아 우리나라에 갑니다"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13번선 지하철 페르네티역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전날 전화로 인터뷰요청을 했을 때 『말주변이 없어서…』라고 꺼렸던 그는 약속시간인 28일 오후 3시가 못미처 나타났다.
청티셔츠 차림의 「무슈 옹그」(Monsieur Hong, 미스터 홍)는 지하철을 타고오며 읽은 것 같은 좌익진보지 「리베라시옹」을 손에 들고 있었다.
『「우리」를 찾으러 우리나라에 갑니다』
홍세화(洪世和·52)씨는 지하철역 건너편 메트로카페에 자리를 잡은 후 필터없이 말아피는 드럼담배를 기자에게 먼저 하나 만들어주고 자신의 입에도 하나 물고는 이렇게 담담히 말했다.
_얼마만의 귀국인가요.
『14일 서울에 가니 정확히 20년 2개월하고 보름이 되겠군요』 서울대 외교학교를 나와 무역회사의 파리주재원으로 나와있던 중 유신치하 세칭 남민전사건에 연루돼 정치망명객이 되어버린 홍씨. 95년 출간된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 비평사)가 일본어로 번역돼 나온 97년 도쿄(東京)에 초청된 것이 한국에 가장 가깝게 가 본 것이었다고 그는 담담히 말했다.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 가 볼 수 있다던 우리나라의 「마지막」망명객.
그는 31일 나온 두번째 저서인 문화비평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나눈다」(한겨레신문사 출간) 출판기념회(6월17일 오후 6시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참석과 모교인 서울대 강연 등을 위해 아내 박일선(朴一善·51)씨와 서울에 와 3주 정도 머문다.
_귀국하는 심경이 어떻습니까.
『한편 싱숭생숭하고 한편 두렵기도 하고… 뭐랄까 이중적 복합적인 기분이군요』 그는 지금껏 자신을 정신적으로 버티게 해줬던,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우리에 대한 그리움」이 깨질까봐 두렵다고 했다. 태어나고 자란 조국의 친지 동료 등 사람들과 하늘과 땅 자연, 이런 것들이 하나로 녹아진 것이 그의 「우리」이다. 『내가 있는 곳에 「우리」가 없어 쓸쓸했다』고 그는 지난 20년 세월을 함축했다.
『조국의 좋은 것들은 기억에서 한없이 증폭됐고 나쁜 것들은 까마득하게 잊었어요. 그래서 더욱 두려워요. 한국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제 딸아이(그는 1남 1녀를 두었다. 딸 수현(穗賢·22)은 영국에서 대학원을 나온 후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아들은 프랑스 대학에 재학중)가 서울에선 행인들끼리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간다고 말하더군요. 밀어부치는 사회, 억지가 통하는 사회, 몰매를 주는 사회, 가진 사람들의 공격적인 모습들… 그동안 기억에서 아스라히 사라졌던 악몽이 살아나게 되겠죠』 하지만 그는 『봄바람에 날리는 서울의 먼지조차 그립기 때문에 한국에 간다』고 말했다.
_왜 귀국을 미뤄왔습니까.
홍씨는 자신에 대한 공소시효가 이미 87년에 만료됐다는 사실을 DJ정부가 들어선 지난 해에야 처음 알게 됐다.
『95년 첫 책을 출간했을 당시 변호사를 통해 당국에 알아봤더니 공소시효에 망명기간의 산입여부를 놓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보이더라는 겁니다. 정권이 그렇게 나오는데 굳이 애쓰면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정부가 바뀌고 지난해 초 대사면조치에 제가 포함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름이 빠져있더군요. 그때는 조금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서울 친구들이 법무부에 문의했더니 공소시효가 이미 오래 전에 끝나 사면해줄 것이 없다는 얘기더라는 겁니다』 법률이 정권의 노리개라는 사실을 홍씨는 이렇게 또 한번 실감했다고 한다.
_한국에 가면 꼭 하고 싶은게 있습니까.
『「우리」를 찾아갈 겁니다. 제일 먼저 김포공항에서 내려 조국의 하늘을 우러러 볼 겁니다. 그리고 산과 들 사이에 강이 흐르고 언저리에 마을이 있는 산천을 찾아가고 친구들과 만날 겁니다. 젊은이들과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싶어요』 그는 명동칼국수, 무교동낙지, 콩나물밥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_그동안 생계는 어떻게 꾸려왔습니까.
『관광가이드로 시작해 택시운전사를 3년간 하다가 친구가 하는 무역업을 도와주기도 하고 한동안은 한국의상실에서 관리일을 보기도 했습니다. 집사람이 면세점에서 일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죠』 그러나 지난 해 1월 이후 홍씨 부부는 실업자가 됐다. IMF 타격으로 한국의상실이 문을 닫고 한국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면세점도 감원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프랑스정부에서 나오는 실업수당과 그동안 들어왔던 인세, 그리고 서울에서 요청을 받아 쓰는 기고료 등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홍씨는 첫 책이 30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는 덕택에 처음으로 목돈을 쥐어 수년전 파리 교외 쿠르브부아에 30평짜리 아파트를 절반은 은행대출을 끼어서 구입했다. 함께 모시고 살던 장모는 지난 해 운명했다.
_영구귀국할 생각은 없는지요.
『현재로서는 정확히 말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에 들어가서 우선은 이것 저것을 두리번거려볼 생각입니다. 20년 공백이 있었는데 누가 저를 붙여주겠습니까. 잡문이나 계속 써가면서 천천히 생각해볼 겁니다』 홍씨는 정치에 뜻은 없느냐고 농담반으로 물은 질문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화를 내듯이 잘라 말했다.
홍씨는 인터뷰를 마친 후 그가 나온 지하철 역사로 사라졌다. 파리의 대부분 역들과 달리 이 역은 출구가 하나 뿐이었다.
/파리=송태권 songtg@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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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홍세화 귀국을 도운 사람들
홍세화씨의 귀국에는 홍씨 자신이 인터뷰에서 밝힌대로 「서울 친구들」이 큰 역할을 했다. 대학시절 그의 연극반 동료였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미술평론가 유홍준(영남대 교수)씨와, 연극연출가 임진택씨가 주도해 결성한 「홍세화 귀국추진 모임」에 속한 면면들이 그들이다.
이 모임은 최근 홍씨 귀국이 결정되자 성명을 내고 『그는 이제 어제의 망명객에서 우리에게 유럽문화를 가장 잘 알려줄 수 있는 당당한 문화비평가로서 조국의 대중 앞에 어엿이 서게 된 것』이라며 홍씨의 귀국을 환영했다.
이 모임이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올해이지만 사실상 95년 홍씨 자신은 참석하지 못하고 열렸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출판기념회에서 태동했다. 홍씨는 서울대 공대 66학번에서 외교학과 69학번으로 다시 입학했다.
연극연출가 임진택씨는 홍씨의 경기고 3년 후배이자 외교학과 동기생. 유홍준씨는 미학과 67학번으로 이들은 대학 3·4학년 때 연극반 활동을 같이 했고, 홍씨의 망명 후에도 끈끈한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후 유씨와 임씨의 주도 하에 서울대문리대 운동권 출신들의 모임인 「문우회(文友會)」도 가세했다. 문우회는 유인태 이철 손학규 전 의원 등 문리대 65~69학번 40여명이 10여년 전 결성한 모임.
현재 「홍세화 귀국 추진 모임」의 회원은 80여명. 고은 백낙청 신경림 김지하 황석영씨 등 문인, 안병욱 심지연 김세균 최원식 교수 등 학계인사, 리영희 김종철 장명국씨 등 언론인, 이부영 김근태씨 등 정치인과 박형규 목사 등이 일원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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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홍세화 귀국을 도운 사람들
홍세화씨의 귀국에는 홍씨 자신이 인터뷰에서 밝힌대로 「서울 친구들」이 큰 역할을 했다. 대학시절 그의 연극반 동료였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미술평론가 유홍준(영남대 교수)씨와, 연극연출가 임진택씨가 주도해 결성한 「홍세화 귀국추진 모임」에 속한 면면들이 그들이다.
이 모임은 최근 홍씨 귀국이 결정되자 성명을 내고 『그는 이제 어제의 망명객에서 우리에게 유럽문화를 가장 잘 알려줄 수 있는 당당한 문화비평가로서 조국의 대중 앞에 어엿이 서게 된 것』이라며 홍씨의 귀국을 환영했다.
이 모임이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올해이지만 사실상 95년 홍씨 자신은 참석하지 못하고 열렸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출판기념회에서 태동했다. 홍씨는 서울대 공대 66학번에서 외교학과 69학번으로 다시 입학했다.
연극연출가 임진택씨는 홍씨의 경기고 3년 후배이자 외교학과 동기생. 유홍준씨는 미학과 67학번으로 이들은 대학 3·4학년 때 연극반 활동을 같이 했고, 홍씨의 망명 후에도 끈끈한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후 유씨와 임씨의 주도 하에 서울대문리대 운동권 출신들의 모임인 「문우회(文友會)」도 가세했다. 문우회는 유인태 이철 손학규 전 의원 등 문리대 65~69학번 40여명이 10여년 전 결성한 모임.
현재 「홍세화 귀국 추진 모임」의 회원은 80여명. 고은 백낙청 신경림 김지하 황석영씨 등 문인, 안병욱 심지연 김세균 최원식 교수 등 학계인사, 리영희 김종철 장명국씨 등 언론인, 이부영 김근태씨 등 정치인과 박형규 목사 등이 일원이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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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홍씨의 책 '…한강은 남북을 나눈다'
첫번째 책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그 자신의 삶에 대한 독백인데 반해 두번째 책은 프랑스에서 바라본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비평 에세이다.
『파리에 처음 왔을 때 세느강을 좌안 우안으로 나누는 것이 신기했어요. 한국은 강남 강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게 양국의 문화차이를 단적으로 암시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프랑스는 좌우이념의 정치세력이 동거를 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이 되어 있죠. 또 한국과 프랑스 사회의 특징인 패거리주의와 다양성이 어디서 비롯되는가도 숙제거리였습니다』
홍씨는 새 책의 서문에서 『과거에 한국사회를 살았던 젊은이가 오늘 한국사회를 사는 젊은이에게 프랑스 사회를 통해 말을 걸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강남을 알지 못하고 압구정동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삼품백화점이, 성수대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내가 알지 못하는 한국을 20년동안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나무 하나하나는 보지 못했지만 한국사회라는 숲은 20년동안 보아왔다』고 적었다.
그는 그 숲에는 온통 탁류가 흐르고 있다며 탁류는 수치심이 없는 뻔뻔스러움과, 약삭빠른 냉소, 절망과 체념의 신음소리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고 했다.
홍씨는 망명생활 중 꾸준히 한국 신문을 구독하는 등 조국의 문제에 잠시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자신에게 헛된 욕심과 과포장을 가져다 준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잊어버리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현실의 택시운전사」로 돌아가는 각오로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파리=송태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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