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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칼럼]'노래방'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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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칼럼]'노래방' 나라

입력
1999.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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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차마시는 자리에서 한 사람이 『만일 노래방이 없다면?』이란 질문을 던졌다. 『범죄가 크게 증가할 거예요』 『직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늘어날 겁니다』『가정의 평화에도 영향이 있겠지요』라는 어마어마한 대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노래방이 그만큼 시민들의 스트레스 해소에 기여하고 있다는 소리다.우리는 세계 어느나라보다도 스트레스가 심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경쟁이 치열하고, 게임의 법칙이 잘 지켜지지 않고, 본질 아닌 것이 더 중요한 작용을 할 때가 많고, 무질서와 혼란이 극심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에 분노하고 신경을 쓰느라고 기력을 소진해 버려서 막상 일을 해야 할 때는 능률이 오르지 않는 것을 우리는 흔히 경험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노래방은 확실히 어떤 기능을 하고 있다. 직장인들은 노래방 모임에서 갈등과 스트레스를 풀고, 이웃 주부들끼리 동네 노래방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한다.

시험이 끝난 자녀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준다고 노래방에 가는 가족들도 있다. 노래방은 계층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의 국민적 오락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그러나 때때로 지나치게 치닫는 한국인의 특성이 이 노래방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노래하기와 노래듣기를 강요함으로써 전국토를 노래방화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노래방 열기와 관광의 상승작용은 종종 폭력으로 치닫기도 한다. 한 50대 부부가 관광버스를 탔다가 봉변당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정말이지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경주에 먼저 가있는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관광버스를 탔다고 한다. 버스에는 중년의 남녀들이 타고 있었는데,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노래방시설이 켜지고 노래자랑이 시작됐다. 시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들은 맨 뒷자리에 앉은 채 꾹 참고 있었다. 그러나 노래와 함께 너도나도 춤까지 추는데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운전에도 지장을 주겠다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운전사에게 항의를 했고, 운전기사는 구세주라도 만난듯 반기면서 『피곤해하는 손님이 있으니 좀 조용히 해 달라』는 방송을 했다.

사람들은 불평을 하면서도 십분정도 조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노래와 춤을 다시 시작했고, 술을 마시면서 차츰 거칠어 졌다.

너희들이 고상하면 얼마나 고상하냐는 노골적인 반감으로 일부러 코앞에서 엉덩이춤을 추고, 어깨에 부딪치는 사람도 있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역겨움과 공포를 느꼈다. 그들은 결국 중간에서 탈출하듯 버스를 내렸다고 말했다. 그들은 지금도 노래라면 진저리를 친다.

얼마전 제주도에 갔을 때 나도 노래에 진저리를 친 적이 있다. 우리는 마라도에 가는 배를 탔다. 바람많은 제주라는데 그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순하게 일렁이는 망망대해에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우리는 충만한 휴식의 느낌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배가 출발하자 곧 노래방 시설이 켜졌다. 노래에 멀미가 나자 바다에도 멀미가 났다. 돌아오는 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라도에서까지 그런 난장판을 겪다니 어이가 없었다. 우리 일행도 전날 저녁에는 노래방에 가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그 아름다운 바다 위에서도, 또 노래라니!

공공장소에서 노래방시설을 켜거나 유행가를 크게 트는 것은 폭력이다. 버스나 택시나 배에서 조용히 있고 싶은 사람들을 조용히 있게 해야 한다.

내가 즐거운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나와 다른 주장을 펴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고, 내편이냐 적이냐를 먼저 가르는 흑백문화와 획일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들속에 도사리고 있는 매우 위험한 특성, 분별을 잃고 치닫는 폭력적인 열기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

행락철이 되면 전국토가 쓰레기장이 된다고 우리는 한탄해 왔다. 전국토가 노래방이 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우려할만한 현상이다. 그속에 우리의 온갖 병폐가 다 들어 있다. 노래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노래는 노래방에서만, 원하는 사람들끼리만 즐겨야 한다.

/본사주필 msch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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