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11월 27일 유혈사태를 불렀던 5개국 친선 국제프로레슬링대회. 당시 국내파 최고수였던 장영철의 제자들은 왜 경기 도중 링 위에 올라 일본선수를 집단폭행했을까? 또 일본에서 활약하던 김일 선수는 어떻게 국내에 입성, 순식간에 제1인자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MBC는 60, 7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프로레슬링의 비화를 27일 밤 11시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연출 허태정)를 통해 파헤친다.65년 대회 마지막 날, 장영철과 일본 오쿠마 선수의 대결. 2류 선수에 불과했던 오쿠마가 장영철의 허리를 꺾어들어가자 갑자기 장선수의 제자들이 링 위에 올라가 오쿠마를 집단 폭행했다. 이때 장영철은 마이크를 들고 『다음은 김일에게 도전하겠다』고 선언, 관중들을 의아스럽게 만들었다.
장영철의 주장. 『그날 오쿠마의 기술은 일반적인 레슬링 기술이 아니었다. 나를 진짜로 불구로 만들기 위한 기술이었다. 대회 프로모터였던 김일이 나를 레슬링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계략이었다』 이에 대한 김일의 주장. 『2류 선수에게 질 줄 몰랐다. 기술이 먹혀들어갔으면 항복하면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실력이다』 이 대회 후 장영철은 링을 떠났고, 국내 프로레슬링계는 김일을 중심으로 한 해외파가 장악했다. 당수의 고수 천규덕도 김일 아래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박치기왕」 김일의 국내입성 경위.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주름잡았던 역도산의 수제자 김일은 63년 자신의 신원보증인이기도 했던 역도산이 사망하자 곧바로 귀국했다. 당시 국가재건을 위해 스포츠영웅을 필요로 했던 박정희 정권의 눈에 김일은 최적의 선수였다. 이후 공화당 원내총무였던 김용태씨가 프로레슬링협회 초대 회장에 취임하는 등 프로레슬링은 박정희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10·26사건 직전까지 대중스포츠로 군림했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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