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내 시의 한순간]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내 시의 한순간]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입력
1999.05.25 00:00
0 0

은희경의 소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를 펼쳐보다 문득 서문의 한 대목에 마음이 머문다. 그녀는 『그동안 내가 스쳐지났던 마을들, 바닷가, 굽은 길, 절터, 낮은 산들, 차가운 달과 시리우스… 내 눈물이 떨어졌던 모래밭_그 아름다운 동반에 대해서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쓰고 있다.약간 뉘앙스는 다를 수 있겠지만 언제부턴가 나 역시도 그 자연의 일부분들에 대해 깊은 고마움을 지니고 있다. 열애의 한복판을 떠나온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 뜨거웠던 시절에 내 망막에 맺혔던 별과 달과 꽃의 떨림 같은 아련한 풍경들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시집을 준비할 때면 나는 어김없이 고향집을 찾는다. 고향 마을의 솔밭 가에는 작은 저수지가 하나 있는데, 시가 안될 때면 난 저녁 어스름의 저수지 둑길을 거닐곤 했다.

그 옛날엔 나를 매혹시켰던 사람을 생각하며 그 저수지에 돌을 던졌고, 이번 시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를 쓰면서는 한동안 잊고 살았던 그 매혹의 기억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 저수지에 비친 달에 하나 둘 돌을 던져넣었다.

그때 난 미니 카세트로 얀 가바렉의 「열두 개의 달」을 듣고 있었다. 그래, 한때 내게도 매혹의 환희와 절망, 그리고 깊은 상처가 만들어낸 수많은 달이 존재했었다.

「그녀와 내 두 눈에 담긴 네 개의 달/강물에 내려앉은 달과/한 마리 살랑대는 은어의 눈동자를 비추던 달/그리고 저 솔숲 부엉이의 두 눈과/그녀의 눈물에 고이던 노란 달빛」(「열두 개의 달」 부분).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주의 모든 것들은, 각기 단 하나의 모습만으로 존재하는 법은 없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전율하고 폭발을 일으키며 자기확장을 거듭한다. 단 하나의 달이 여러 개로 자기증식을 거듭하는 마법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 그게 열애의 떨림 속에 사는 자의 행복이 아닐까.

그 수많았던 달이 떠나가버린 지금 내 마음의 저수지엔 단 하나의 달이 덩그렇게 떠 있다. 나는 그 달의 이름을 「추억」이라 부른다. 그리고 어렴풋이 예감한다. 이제 나를 시쓰게 하는 것은 매혹의 에너지가 아니라, 그것을 추억하는 힘이란 걸.

/시인·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재즈에세이 「재즈를 재미있게 듣는 법」등.

(C) COPYRIGHT 1999 THE

HANKOOKILBO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