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함」 「진실과 인간에 대한 천착」 이라는 말이 인터뷰 내내 그의 입을 떠나지 않았다. 마흔 넷, 그리고 PD생활 17년. 세상 물흘러가는대로 편하게 살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시대와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KBS 장해랑( ) PD다.『사람들은 세상이 조금 좋아졌다고들 하죠. 하지만 소외된 자가 여전하고 빈부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집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82년 KBS 다큐 PD로 입사, 시사, 교양, 다큐 프로를 고루 거쳤다. 제대하고 아르바이트로 하던 방송사 스크립터 일 덕분에 방송 생리를 조금 알았다. 그래도 그는 신문사 기자가 되고 싶었다. 역사와 사건의 현장에서 기사를 쓰고 싶었다. 그때부터 다큐라는 숙명을 안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연세대 신방과를 졸업할 쯤 방송사 입사시험에 덜컥 합격해 버려 PD 일을 시작했다.
입사 첫 해 「시민법정」에서 호화혼수 등 사회문제를 다뤘고 83년 PD저널리즘이라는 용어를 낳은 「추적 60분」에 참여했다. 「생방송 오늘」 「르포2020」 「뉴스비전, 동서남북」 「현장기록 요즘 사람들」 「다큐멘터리 세상」 「세계는 지금」 그리고 현재의 「환경 스페셜」 까지 KBS의 간판 다큐와 시사 프로에서 거의 연출을 도맡았다.
그는 연출하면서 가진 자 보다는 없는 자에게, 개인의 잘못보다는 구조적 모순에 고민했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초점을 맞췄다. 『군사정권 시절 취재를 나가면 국민들이나 시민운동 단체에서 KBS라고 취재거부를 했지요. 그래도 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무릎을 꿇고 사정하며 프로를 만들었습니다. 결코 그런 내 모습이 비굴하다고 생각든 적은 없습니다』 진정한 프로의 면모를 엿본다.
이런 장PD였기에 회사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시민운동 단체나 시청자 단체 등에서 그를 올곧은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의 프로가 나올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다큐란 혼과 신명을 한 컷 한 컷에 쏟아 붓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과 역사 그리고 인간의 문제를 생각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널리즘과 영상아티즘이 조화를 이뤄야 하지요』 그의 다큐관이다.
그는 새로운 목표, 진정한 영상 저널리즘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과 가족에게도 매우 엄격하다. 『밥알을 남기면 지금도 세 딸을 혼내요. 그리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면 용납을 못해요』 요즘에는 세 딸에게 부드러운 아빠가 되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같이 일하는 동료와 시청자들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사람이다. 인터뷰 도중 KBS 본관 4층 사무실에는 쉴 새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시청자 문의에서 프로그램 제작논의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모든 전화에 공손하고 성실하게 응답했다.
그는 한 번 작업에 들어가면 꿈속에서도 프로가 나타난다고 한다. 함께 작업하던 작가와 86년 결혼했으니 아내는 남편을 많이 이해하는 편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장PD가 잠자다가 『자, 이렇게 갑시다』 잠꼬대를 외쳐도 놀라지 않는다.
그는 97~98년 2년 동안 PD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장PD지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해방공간 3년간의 역사를 조명하는 프로를 만들지 못한 것. 언젠가는 이부분을 꼭 다루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에 응하면서 내건 조건이 하나 있었다. 이 말을 꼭 써달라는 것이다.『나보다 훨씬 유능하고 훌륭한 그러면서 자신과 사회 그리고 역사에 대해 고민하는 PD가 많습니다』
/배국남기자 knb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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