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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의 한순간] 김기택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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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의 한순간] 김기택 `봄날'

입력
1999.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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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봄이라기엔 조금 쌀쌀한 3월 어느 아침, 버스를 타고 가다가 아파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햇빛을 쪼이는 한 할머니를 잠깐 본 적이 있다. 내 기억으로 할머니가 앉아있는 곳은 도로와 아파트 사이의 좁은 길이었고 차들이 많이 다니고 시끄러워 봄볕을 즐기기에는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겨울 내내 아파트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 추운 날에 저런 곳에 나와 햇볕을 쪼일까 하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온몸으로 햇볕을 받고 있는 할머니의 환한 모습이 겨울에 핀 꽃처럼 낯설어서 내 머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잘 지워지지 않았다.할머니가 즐기던 그날의 봄볕은 아파트 앞의 좁은 길이나 도로변의 소음 따위를 전혀 개의치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할머니는 아직도 피지 않은 봄꽃들을 미리 바라보고 즐기고 있지 않았을까? 할머니가 쪼이던 봄볕은 아파트 앞의 그것이 아니라 양지 바른 툇마루에 내려앉던 고향냄새 나는 푸짐한 봄볕이아니었을까?

버스가 할머니를 지나치고 한참이 지나자 나는 할머니가 쪼이던 그 차가운 봄볕이 점점 환해지고 따뜻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그 봄볕은 「굵은 주름 잔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할머니들의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볕으로 할머니들이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거칠고 두꺼운 나무껍질을 뚫고 올라오는 연약하고 부드러운 새 잎처럼 그렇게 거친 할머니의 주름살을 뚫고 새로 「뽀얀 젖살」오르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그 햇볕에 녹은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 소리도 커다랗게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 속에서 그 해의 봄꽃들이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여느 해 같았으면, 일찍 핀 개나리나 목련, 조금씩 푸르게 바뀌어가는 나무나 산, 거리에 지나치는 여자들의 밝고 화사한 옷차림을 보고서 봄이 오는 것을 느꼈을 터이지만, 그 해는 할머니에게 내리쪼이던 그 햇볕을 보고서야 봄이 왔음을 알았다. 봄에는 싱그러운 젊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억 년 묵은 나이도 있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봄이 수억 살 먹은 할머니라는 것이 느껴지자 그 해 봄이 다른 어느 해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눈부시고 환한 봄날이었다./시인·시집 「바늘 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등·제14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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