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과 함께 30년 교직생활을 일궈온 오익균(吳益均·59)교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집쟁이」다. 굳게 다문 입술과 걸걸한 목소리, 간간이 보이는 어색한 눈웃음이 오교사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오교사의 전공과목은 농업이지만 76년 충남 우성중에서 농악과 인연을 맺은 후 그 매력에 빠져들어 20여년간 제자들에게 농악을 가르치고 있다.
『당시 문맹(文盲)인 노인들을 대상으로 야학교사를 했는데 쉬는 시간에 할머니들이 읊조리는 타령가락이 참 구수하게 들리더군요』 노인들과 함께 책상을 두드리면서 타령을 배우다보니 날이 새는 건 금방이었다. 이를 계기로 오교사는 우리전통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꼈고 본격적으로 농악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원래 한번 빠지면 좀처럼 옆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의 오교사는 이때부터 농악과 떨어질 수 없는 인생이 됐다.
전통에 대한 애착은 곧 가르침의 열정으로 이어졌고 재임하는 학교마다 농악부를 만들어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은 물론, 동네에서는 자비를 털어 농악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오교사 자신도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힘든 연습이 끝나면 20평 남짓한 자택으로 학생들을 데려가 삼겹살을 구워주는 자상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학생들도 오교사의 열정을 외면하지 않았다. 5회(87년), 10회(92년) 전주 대사습놀이 장원, 서울 풍물놀이마당 92~94년 연속 금상수상, 제2회 전국 청소년 민속예술제(95년) 금상 등 오교사가 지도한 학생들은 각종 농악대회를 휩쓸었다. 또 지난해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충남 서산에서 소떼를 몰고 북한으로 출발할 때 오교사는 제자들과 지역주민들을 이끌고 신명나는 농악공연을 펼쳤다.
하지만 오교사에게도 안타까운 기억이 있다. 88년 오교사는 서울 올림픽 폐회식행사인 「우정」의 공연을 병실에서 TV로 지켜봐야 했다. 행사연출요원으로 7개월 동안 땡볕아래서 300여명의 학생농악대와 함께 비지땀을 흘렸지만 예행연습을 위해 서울로 상경하던 버스가 10중 추돌사고가 나 오른쪽 무릎뼈가 으스러졌기 때문이다. 무려 40일간 입원해 있던 오교사는 아직까지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다리가 편치않다.
내년이면 60줄로 접어들지만 오교사는 지금도 운동장을 뛰면서 농악대를 가르친다. 꽹가리와 장구소리가 아무리 요란해도 학생들을 지도하며 토해내는 오교사의 고함소리는 또렷하게 들린다. 『잘 따라준 학생들이 고맙지요. 남들은 고집통이라고 하지만 저는 열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교사는 부인 이제은(李濟銀·54)씨와 결혼 후 7년 동안 아이가 없었지만 그 뒤 두번이나 쌍동이를 낳아 지금은 4명의 아들과 딸을 둔 자식부자이기도 하다. 이주훈기자 ju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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