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곡동 김현룡씨네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신흥마을. 가느다랗게 흐르는 실개천을 지나 철다리를 건너면 알프스에서나 들어봄직한 양떼소리가 객을 반긴다. 평소 같으면 고요했을 전원마을이 유난히 시끌벅적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부터 손자, 손녀까지 온 가족이 한데 모여 양털을 깎는 날이다.
『기계로 깎으면 기름이 배인다 말야. 기름부분 다 잘라내면 남는 거 없지.힘들더라도 가위로 자르는 것이 좋아』 지금은 아들들에게 목장운영을 맡기고 일선에서 은퇴한 할아버지 김현룡(69)씨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다섯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은 달아나는 양들을 잡아보려고 난리를 치면서도 정작 털깎이가 시작되니까 연실 눈물이 글썽인다. 『할아버지 양들이 아픈가봐요. 울어요.』 『살살 깎아요. 그러다 피나겠어요.』
김씨 내외가 두 아들을 데리고 한남동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이곳 신흥마을 「어둠골」로 들어온 것은 74년. 어둠골은 당시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는 동네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돼지도 길러보고 소, 닭, 오리도 길러봤는데 죄다 헛수고였어. 어떻게 살까 궁리를 하다 대관령으로 갔지. 한 마리에 5만5,000원씩 두 마리 양을 사왔는데, 고맙게도 그게 이제 150마리가 되었어.』
고생 고생 끝에 지금은 땅값 비싸다는 서울에서 2,500평이 넘는 농장을 운영하는 「부자」가 되었지만 김씨는 늘어난 재산보다는 「온 가족이 다 함께 살며 함께 일한다」는 사실이 더욱 기쁘다.
농장에 딸린 주택엔 두 아들의 가족까지 모두 11명이 같이 산다. 큰아들 영배(41)씨 내외는 양갈비를 별미로 내놓는 생고기 전문점을, 작은아들 근배(37)씨 내외는 양털을 가공해 이불과 베개를 만들어내는 공장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서로 믿고 의지하니 얼마나 좋아요. 신혼 때만해도 분가해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그랬죠. 하지만 이제는 양들과 떨어져서는 하루도 못살겠어요』큰 며느리 박미배(39)씨의 말이다.
양갈비에다 양털이불 양털베개…. 아직은 생소해서인지 찾는 이는 많지 않지만 온 가족이 함께 꿈을 키워나가기에 마음은 언제나 풍족하다. 큰아들 근배씨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차있다.
『언젠가는 양모로 이불을 만들고 있는데요, 딸하고 아들 녀석이 자기도 크면 해야 하는데 지금부터 가르쳐 달라는 거예요.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하던지… 그래 열심히 터전 만들자. 그게 부모 몫이다. 그리고 너희 세대엔 세계적인 양털이불을 만들어라. 이런 마음으로 오늘도 힘을 냅니다.』
저녁 무렵 할아버지 내외는 다섯 손자들을 무릎에 앉히고 이리저리 뛰노는 양들을 바라보며 구수한 이야기꽃을 피운다. 3대를 이은 양치기가족의 꿈이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글=허윤정(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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