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지 80주년을 맞는 해. 국가보훈처와 광복회는 지난달 27일부터 8일간의 일정으로 상하이(上海)-항저우(杭州)-광쩌우(廣州)-중칭(重慶)등지로 근거지를 옮기며 독립운동을 총괄한 임시정부의 유적지 탐방을 실시했다. 자문위원으로 탐방단에 참가한 안동대 김희곤(金喜坤·사학과)교수가 임시정부 27년의 발자취를 본보에 기고해왔다. /편집자주상하이시대 상하이(上海)는 교통과 통신이 편리한 국제도시이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집결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보다도 1910년 무렵, 중국에서 가장 진보적 바람이 불던 곳이 바로 상하이였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다. 상하이는 한족이 만주족의 청나라를 깨고 중국을 출범시키며, 군주정을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정이라는 정치형태를 달성해 나가던 혁명의 도시였다. 이런 이유로 독립지사들은 상하이를 한시대 앞서 가는 곳으로 느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1919년 4월13일. 이에 앞서 3·1운동은 독립국임을 선포하였고, 임시정부는 그 독립국을 운영하는 주체로서 수립되었다. 한국사 최초의 민주공화정부였다.
바로 그 유적을 돌아보기 위해 탐방단은 지난달 27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탐방단에 참가한 애국지사와 유족들은 80세 전후의 고령에도 불구, 자신과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을 전개했던 현장을 돌아본다는 감회에 젖어 있었다.
민단, 독립신문사, 인성학교 등 각종 독립운동단체와 지사들이 모여살았던 상하이 유적지는 주로 프랑스 조계 구역에 모여 있다. 프랑스가 정치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특성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40층 가까운 대형빌딩이 들어섰다. 현재 보존된 임시정부 청사도 바로 이웃한 마랑로 보경리에 있는데, 한국인 여행객들은 거의 모두 여기를 들른다. 임정청사앞에서 살다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민영수(78)선생과 신순호(77·박영준의 아내)여사는 흥분을 애써 누르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일행은 프랑스 조계를 벗어나 북쪽 공공조계 지역에 자리했던 홍구공원(현재 노신공원)을 찾아 나섰다. 1932년 4월29일 윤봉길(尹奉吉)의거는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 침공을 자축하는 잔치에서 벌어졌다. 이 의거는 시라카와 사령관 등 두 명을 즉사시켰고, 시게미즈 공사 등 4명을 크게 다치게 만들었다. 일본의 패전후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한쪽 발목을 잃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항복문서에 서명한 외무대신이 바로 이 시게미즈인데, 그러고 보면 미래의 항복문서 서명자를 일찌감치 응징한 셈이다.
이곳은 해방 후 중칭(重慶)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 임시정부 주석 백범(白凡)김구(金九)선생과 그 일행을 동포들이 만세함성으로 환영하고 환송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윤의사에게 『지하에서 만나자』고 작별인사했던 백범, 이로 인해 상하이를 떠나 13년 6개월만에 환국하던 길에 다시 들른 이 자리에서 느낀 그의 감회가 짐작이 간다. 몇년전 완공된 매헌기념관은 중국정부가 북한을 의식, 아직 내부 전시를 허락 받지 못해 개관을 못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속에서 지난해 세워진 기념비는 시 당국이 직접 구한 돌에 「한국인 윤봉길」이라는 국가칭호까지 넣어 외교적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행은 선배 독립지사들이 상해에 첫발을 디딘 황포탄 부두로 나가 보았다.
독립지사나 유학생들이 세계각지를 드나들고, 의열단의 다나카 대장 저격이 기도되었던 그 부두는 지난 1980년대 말에 강변공원으로 바뀌어 버렸다.
관광객 인파로 뒤섞인 부두에 서서, 그날의 모습을 찾을 길 없음에 아쉬워한다.
이동시대
1932년 5월 임시정부는 13년동안 근거지로 삼았던 상하이를 떠났다. 윤봉길의거가 일어나자 프랑스 조계 당국도 더 이상 독립운동자들을 보호해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그해 5월8일 윤의사 의거가 자신의 책임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로이터통신을 통해 세계에 알렸다. 일제탄압에 처한 동포를 살리기 위해 체포 위험을 각오하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인과 가족은 상하이를 벗어나 치아싱(嘉興)으로 급히 피신했다.
일제체포조가 파견되었고, 포위망은 시시각각 좁혀들었다. 임정의 독립운동을 먼 산 보듯 해온 중국 국민당정부는 가흥 출신 유력인사인 저보성(楮補成)을 통해 급히 백범 보호에 나서도록했다. 당시 상해법학원장(법대 학장)이던 저보성은 양아들로 하여금 백범의 피신처를 제공했고, 임정 요인도 그 주변에 머물렀다.
탐방단은 백범과 임정 요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나갔다. 상하이에서 남서쪽으로 고속도로를 따라 한시간 가량 달려 가흥(嘉興)에 도착한 일행은 일휘교(日暉橋)17호에 자리잡은 요인들의 거주지와 이동녕·엄항섭·김의한 등이 머물렀고 학생 시절 박영준이 공부했다는 집을 둘러 보았다.
다음으로 백범이 피신해 있던 매만가(梅灣街)76-4호를 찾아갔다. 매만이란 이름처럼 이 집은 베이징(北京)과 항저우(抗州)를 연결하는 운하주변의 작은 호숫가에 자리잡은 2층집이었다. 앞으로는 골목길에 이어지고 뒤로는 호수가 있어 잠복과 탈출에 무척 용이한 집에서 백범은 임시정부를 원격조정했다. 임정 요인의 거주지에서 300㎙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요인들조차 이 은신처를 몰랐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항저우로 다시 이동했으며 이 곳에서도 세 군데를 옮겨 다녔다. 재개발 과정에서 오직 한 곳만 남아 있는데 , 판교로(板橋路) 오복리(五福里) 2롱(弄) 2호가 그것이다.
항저우의 골목길을 따라 일행은 한국독립당 지사들의 활약상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특히 오영걸(62)씨는 아버지 오광선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연신 기웃거렸다. 그리고 임정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일제침략기 말기인 1940년대에 국내에서 결사적 투쟁을 벌여 명성을 날렸던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의 유흥수(78), 개성 안주중학교 송학사의 홍성여(74), 서울 부민관 투탄의거의 조문기(72)등 애국지사들도 선배들이 민족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지내던 그 골목길을 감명 어린 눈빛으로 거듭 둘러보았다.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난징(南京)입구에 있는 진강(鎭江)으로 옮겨갔다. 임시정부가 수도인 난징에 자리잡을 경우 일본군이 양자강에서 함포사격 하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까지 난징에서 머물다가 전선의 이동에 따라 광쩌우(廣州) 등을 거쳐 1939년에 중국의 임시수도인 중칭으로 이동했다. 그 행로를 따라 샅샅이 훑어보고 싶었지만, 정해진 일정으로 인해 그저 이야기로 반추하면서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중칭시대
너무나 무더워서 난징·무한과 더불어 중국의 3대 화로중 한곳이라는 중칭, 여름을 제외하고는 연일 안개가 끼어 해가 나오면 개가 짖는다는 중칭, 그래서 일본의 공습을 피해 국민당정부가 임시수도로 삼고 항전을 벌인 곳.
임정이 이곳으로 이동한 시기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에서 1940년 사이였다.
임정은 이곳에 자리잡으면서 우파 정당을 통합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 1941년 12월에는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승전후 수립할 국가의 모습을 「건국강령」으로 천명했다.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통합하고 민족혁명당을 합류시킴으로써,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을 달성했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염낙원(61·광복군 염온동의 아들), 오영걸(63·광복군 오광선의 아들)등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중경생활을 더듬느라 무척 들떠 있었다. 그렇지만 광복군총사령부 건물이었던 추용로 37호는「미원(味苑)」이란 식당이 들어 서 있었고, 당시의 모습 일부만이 2,3층에 간직돼 있었다. 이곳에서 광복군으로 활약했던 지복영(79·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딸), 신순호, 민영수, 이윤장(76)선생 등은 옛 모습을 그리며 회상에 잠겼다. 특히 총사령부에 근무하며 점심시간에 근처 국제영화관에서 신편 영화를 즐겼다는 지여사는 「애수」라는 영화가 기억에 남는다며 소녀처럼 웃었다.
중칭에서 임정은 네 군데를 옮겨 다녔다. 현재 남아있는 청사는 마지막 것이다. 필자가 1991년 11월말에 광복군사편찬을 위해 현지조사를 갔을 때, 그곳에 살던 33가구 주민들이 우리 일행을 철거반으로 오인하고 뛰쳐 나왔었다. 이에 놀란 조사단은 국내로 급보를 보냈고, 3년간의 협상끝에 1995년 8월15일 기념관을 개관할 수 있었다.
기념관에서 차영조(55)씨는 그의 아버지이며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차이석선생이 근무하던 방에 고국에서 마련해 온 부친 사진을 모시면서 감격에 떨었다. 솟구치는 그의 격정이 곁에선 필자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임정은 광복군 창설 직후 1년동안 총사령부를 시안(西安)으로 옮겼다. 화북지역에 와있던 한인청년들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적 전진배치였다. 시안에 도착한 일행은 그러나 총사령부가 있던 이부가(二府街) 4호에서 허망해져 버렸다. 새로운 시가지로 개발되면서, 몇 년 전까지 남아있던 총사령부 건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기야 55년이 훨씬 넘은 이야기 아닌가. 장철 (77)선생은 바로 이곳에서 활약했고, 지복영 여사도 한때 이곳에 머물렀으니, 그 감회가 남다를 밖에.
광복군 1지대 소속으로 안휘성일대에서 활약했던 한재갑(78), 2,3지대 소속으로 베이징 등지에서 활약했던 인순창(80), 박성관(76)선생 등은 자신의 활동지역을 가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지긋이 누르고 있었다.
전체 일정을 마치면서 조문기선생은 『독립운동자들은 끝까지 독립운동자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생존 유공자 300명이 독립운동을 벌이던그 마음으로 친일잔재 청산과 통일운동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이 말을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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