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이나 부동산을 할 만큼 목돈을 지니지 못한 서민에게도 돈바람은 예외가 아니다. 소액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경마 등 합법적인 도박과, 사행심을 불러일으키는 갖가지 경품행사는 서민들의 「돈독」을 부추긴다.일요일인 9일 경기 과천시 서울경마장. 경마 관람석 6개층을 빈틈없이 메우고 그것도 모자라 경주로 주변 콘크리트 바닥에 돗자리나 신문지를 깔고 앉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경마 예상지에서 눈을 떼지못한다.
『5,3이다』라는 외침과 함께 갑작스런 함성이 일자 사람들은 대부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전광판을 통해 5번마와 3번마가 1,2등이라고 게시되자 주먹을 꽉쥔채 눈물까지 비치며 감격스러워하는 몇몇 사람의 머리위로 쓸모없어진 마권들이 거센 바람에 흩날린다.
이날 경마장에 입장한 관람객수는 모두 4만3,507명. 바람이 심하게 불고 비까지 간간이 듣는 날씨였지만 경마장 입구는 경주 시작 몇시간전부터 입장객으로 장사진을 이뤘고 주차장은 물론 주변도로까지 자동차로 몸살을 앓았다.
올들어 경마가 열린 토·일요일 33일간 과천 서울경마장과 경인지역 20개 지점을 찾은 사람은 모두 375만4,000여명.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만명이 늘었고 경주일 하루 평균 11만3,000여명이 입장한 셈이다. 마사회는 『경마가 건전 레저스포츠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지만 대부분이 3만원 이상의 고액베팅이라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경마열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다.
서울 양천구에 산다는 정모(52)씨는 경마장 출입 15년차의 베테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IMF전보다 배는 늘었어요. 가족 단위 관람객도 늘었지만 관람객의 70%는 돈을 불려보려고 기웃거리는 부류로 보면 됩니다』 정씨가 목격한 「IMF 경마족」의 모습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전세방을 빼 이삿짐을 주차장에 세워놓고 베팅하다 사글세도 못건진 가장, 밀린 물품 대금을 입금하려고 마권을 샀다 집까지 팔게된 화장품 대리점 부녀사원, 가게 보증금 1억원을 1년만에 날려버린 식당주인 등등.
경마장 곳곳에 20대 중후반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몰려앉은 것도 새로운 풍경이다. 6개월전부터 출입했다는 회사원 박모(28)씨는 『한달치 월급을 모두 날린 적도 있지만 지금은 신중하게 베팅한다』고 밝혔다.
대형백화점과 유통업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고액경품·사은품행사를 빗댄, 이른바 「사바사바 쇼핑」과 여기에 편승한 소비심리도 빼놓을 수 없는 돈바람현상 중 하나이다.
현금 3억원, 1억5,000만원짜리 아파트, 수천만원대의 고급외제승용차, 500만~1,000만원어치 상품권, 결혼비용, 대학등록금 등 업체들이 쏟아내는 고가경품들은 거품경제 때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것들이다. 심지어 지방의 한 백화점은 무료성형수술까지 내걸었다가 여론에 밀려 백지화하기도 했다.
지난달 3,500만~6,500만원대의 고급승용차를 경품으로 내건 한 백화점행사엔 첫날에만 7만여명의 고객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경품권을 탈 수 있는 최소구매액은 10만원. 매장 곳곳에서 『기왕이면 10만원을 채우라』는 점원들의 노골적인 호객행위가 이뤄졌고 『어차피 쓰는 김에…』라는 심정으로 물건 한 두개를 더 집어드는 고객들을 목격하기 어렵지 않았다. 점심시간이면 인근 사무실의 남자회사원까지 몰려 경품경쟁에 가세했다. 회사원 김모(42)씨는 『남자직원끼리 세일기간동안 순번을 정해 물건을 사고 경품권을 타왔다』며 『당첨보다는 호기심 어린 도박심리에 이끌렸다』고 전했다.
H백화점의 관계자는 『IMF로 위축된 소비자의 구매력을 자극하기위한 업체들의 「충격요법 마케팅」이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고 있다』며 『요즘은 동일한 비용으로 여러개의 작은 경품을 준비하느니 큰것 하나를 내놓는게 고객유치에 효과적이다』라고 전했다. 회사원 서모(35)씨는 『경품열풍은 IMF의 직격탄을 맞아 억눌려 있던 중산층의 반발심리』라며 『성실하게만 살다 고스란히 희생양이 됐다는 배신감이 한탕주의를 부추기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상연기자 kubrick@hk.co.kr 이주훈기자 ju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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