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이코노미의 시대에 누가 자본을 무시할까? IMF 터널을 벗어나려면 외국투자가들과 바이어들로부터 환심을 사야함을 누가 모르겠는가? 파업은 부실기업을 양산하고 경제회생을 위한 적자재정의 위험부담을 더욱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누가 겁을 내지 않겠는가?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파업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파업지도부를 범죄자로 몰아 구속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범죄라는 엄청난 「사회적 죽음」을 그들에게 언도할 만큼 정부와 당국자가 노력했다는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 수천명이 거리로 몰려나갈 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한 공론의 장은 형성되지도 않았다. 「1987년」이 10년이나 지난 지금, 더욱이, 작년의 부도경제가 국민들의 희생으로 겨우 추스려진 이 상황에서, 파업을 대하는 정부와 사회지도층의 시선이 더 냉랭해진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파업 일주일을 정리하는 자리에 남겨진 침통한 다짐 뒤에 반노동주의의 오랜 관습이, 또는 임금생활자를 홀대해온 한국지배층의 고약한 승리가가 터져나올까 두렵다.
파업노동자들이 찾아든 곳은 대학과 교회였다.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약자의 외침을 받아주는 곳이 한 군데라도 존재한다는 점은 다행이다. 파업 일주일 동안 그들은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항간에서 그들을 정신나간 집단으로, 법의 파괴자로, 국가경제의 파멸을 재촉하는 패륜아로 몰아세워도 기세를 꺾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업장을 이탈할 수 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를 동시대를 사는 임금생활자들이 모른 척 했다는 바로 그 점에 그들은 절망했다.
「시민의 발을 볼모」로 한다는 얄팍한 머리기사가 해마다 반복되어도 한번도 시선을 바꾸지 않은 채 지배층의 여론에 투항하는 시민들에게 절망했다. 혹자는 「이것이 여론」이라고 하겠지만, 「일자리 나누기」의 적합성 여부, 혹은 노사가 내놓는 정책대안을 둘러싼 여론은 아니었다. 사회운동 단체들은 대화재개 또는 노사정위원회로의 무조건적 복귀가 최선의 방책임을 되풀이 강조하였는데 평조합원들의 거센 반발을 추스리며 1년 넘게 대화에 임했던 그들이 왜 노사정위원회를 논의만 무성한 「토킹숍」(talking shop)으로 단정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다.
파업을 대하는 언론의 자세는 급작스레 애국적으로 바뀌었으며, 언론매체에 편승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다시 경제위기를 거론했다. 현정권의 명칭을 「국민의 정부」로 바꾼들 경제위기의 더 근본적 원인인 이런 일방적 인식구조와 세몰이식 여론형성의 고질적 관습이 바뀌지는 않았다. 노동정치에서 노동이 격리되었던 과거처럼, 파업여론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없었다. 대학과 교회에서 외로운 함성만 질러댔을 뿐이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고 거부할 힘도 없다. 기업투명성을 높이고 작업제도를 개선하면 정리해고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노조의 정책대안이 근거없이 거부된다는 것이 더 문제이다. 노사정이 「과학적 근거」를 갖고 이런 대안들을 논의해 보았는가? 어떤 식자는 미국의 예를 들어 파업자에게 취업금지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빠른 변신이 가능하고 기술인력을 존중하는 미국이라면 그래도 좋다. 기업노조체제에서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규정을 고집하는 것도 온당치 못하다. 기업이 노조와의 사전 협의를 통하여 해고최소화에 성의를 보인다면 감원도 감봉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과 금융의 구조조정에 쏟아넣은 천문학적 비용 때문에 세금이 턱없이 올라도 임금생활자의 노고를 알아준다면 노조가 제도정치를 등지고 「거리정치」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를 이만큼 키우고 민주주의를 이만큼 성숙하게 한 소중한 집단을 자꾸 거리로 내모는 구태를 이제는 끝낼 때도 되었다.
/송호근·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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