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의 원조, 조세형 사건이 터진 것은 서슬푸르던 5공화국 초기였다. 당시 서울 동대문경찰서의 민완 형사계장 길병국씨(작고)는 명륜동·가회동·장충동 등의 유명인사 집만 골라 턴 도둑을 1년이상 비밀리에 추적한 끝에 조씨를 검거했다. 당시 사회부 사건기자로 이 경찰서 관내의 취재를 맡은지 두어달 되던 필자는 검거사실은 물론 연쇄 절도사건조차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경쟁언론사 기자들도 대개 비슷한 처지였다. 변명같지만, 철통보안때문이었다.■사건이 공개된 것은 방심한 동대문서가 검거보고를 올린 것을 석간신문 시경출입기자가 눈치채고 사건의 윤곽을 특종보도하면서였다. 그러나 경찰은 여전히 피해자와 피해내역은 숨기려 했다. 첫 보도 낙종에 데스크의 질책을 받고 수사간부들을 닦달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길통」으로 불린 형사계장과 형사들은 달랐다. 고단한 형사생활 수십년에 가장 큰 도둑을 잡은 무용담과 유명인사 집 금고속의 요지경은 마냥 입다물고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혁명주체·전직 부총리·재벌 딸 등의 피해자와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이름도 생소한 피해품이 드러났다. 유명인사 부인들이 되찾은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서로 제 것이라고 다퉜다는 뒷얘기도 나왔다. 조씨의 절묘한 절도수법과 「의적」행각이 그와 4대1 격투를 30분이상 벌인 끝에 검거한 형사들에게서 솔솔 흘러나왔다. 다음날 한국일보는 그 내용을 보도하면서 조씨를 처음 「대도」로 불렀다. 형사들도 『그래, 대도가 맞아』라고 무릎을 치며 즐거워했다.
■「대도」호칭이 그대로 굳어진 것은 「정의사회 구현」을 떠들던 5공에 대한 반감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피해자들의 구린 뒤는 캐지 않은 채 구치감을 탈출해 거듭 공권력을 농락한 조씨를 청송 보호감호소에 유폐했다. 그래서 『박통이라면 정보부를 시켜서라도 민심과 정권에 상처를 준 피해 공직자들의 뒤를 샅샅이 뒤져 엄하게 다스렸을 것』이란 말이 오갔다. 대통령의 개성과 통치방식은 이런데서도 차이가 있다. 노통이나 YS라면 어땠을까.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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