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충무공 묘소에만 쇠막대 박고 칼 꽂은 게 아니라 여기저기 왕릉에도 물론 퇴계선생 묘소도 훼손했다고 한다. 진술에 따라 얼마나 더 늘어날는지 알 수 없는 이 「묘소 리스트」는 그러나 정신병적인 범행의 양상이므로 논외로 치자.절도 전과가 화려한 한 전문 털이범이 털어놓은 「고관집 리스트」가 있다. 『털었다』는데 대해 『안털렸다』고도 하고, 『털렸어도 내용이 다르다』는 항변이 있지만, 그들 공직자의 집에 있었다고 하는 재물의 크기와 상태가 상식을 뛰어넘는 데는 문제가 있다.
미술품 전문 털이범이 소지하고 있었다는 「고가 미술품 소장자 리스트」도 놀랍다. 범인들은 총리, 국회 부의장, 정당 총재급 정치인, 재벌 회장, 전 장관, 예비역 장성, 교수, 가수, 바둑기사에 이르기 까지 이름과 주소를 들고, 그들 집을 차례로 털 작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여러 형태의 명단 가운데 압권은 병무비리사범으로 적발되었다는 「207명의 리스트」다. 병역면제 판정을 받으려고 돈을 뿌린 사람이 135명, 브로커가 56명, 전·현 군의관이 16명 등인데 그 중 구속자만 100명에 이른다는 것이 발표내용이다.
적발된 사범들 가운데 「권력층」이 보이지 않는 점을 들어 「유전(有錢)병역면제」에서 「유력(有力)적발면제」가 된 것 아니냐는 논란은 아직 남아 있지만, 「돈쓰고 군대 안가기」가 이처럼 무더기로 실증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막힐 일이다. 우리 사회의 「가진 사람들」의 행태가 바로 이런 수준이고, 이런 수준이 불러들인 결정적 장면이 IMF체제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파업 농성현장에서 주섬 주섬 철수하는 노동자들에게 이 리스트들이 어떻게 비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도무지 입맛 쓴 일이다.
노동자들을 파업으로 내모는 동기와 이유는 다양하다. 생존권, 노동조건에서 정치적인 투쟁의 성격에 이르기까지 대개는 절박한 현실과 명분을 깔고 있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되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 동기와 이유가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바로 「소외」요 「박탈감」이다.
소비재를 생산하는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제품을 소유할 수 없는 처지라면 그는 그 제품을 통해 소외감을 맛 본다. 회사의 성장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노동자가 성장의 과실로부터 차단돼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박탈감이다.
공직자의 집에서 김치냉장고 안에 돈다발이 들어있었다든지, 나이 어린 재벌2세가 몇백억원의 재산을 손쉽게 물려받았다든지, 주가조작을 통해 재벌일가가 떼돈을 벌었다든지 하는 일들을 보면서 일할 맛을 내는 노동자, 살맛 나는 서민들이 있겠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오늘은 기쁜 날』이라고 한 것은 서울지하철 파업이 종식된 날 아침 청와대 대변인의 뉴스 브리핑 첫 마디였다고 한다.
바로 그날 저녁 재벌그룹 총수들과의 간담회에서 대통령은 『오늘은 의미있는 날』이라고 거듭 자신감을 보였다고 한다. 지하철파업의 중도철회로 노동계 춘투의 예봉을 꺾었고, 지지부진하던 재벌구조개혁이 힘을 얻어 가속단계로 접어들었고, 대한항공의 족벌경영체제를 깨는데 상당부분 성공하는 등 김대통령의 「강한 정부」가 위력을 보인데 대한 자축의 말이었던 셈이다.
언론은 「파워 DJ」라는 말로 「뜻대로」 성취해가는 대통령의 리더십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의 노동운동 대처방식에 비견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이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 이런 자족(自足)은 너무나 때이르고,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노동운동이 백기(白旗)투항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마치 증시 활황과 외환보유고, 금리 안정 등 몇가지 지표를 근거로 경제위기를 최단시일내 회복하는데 성공했다고 믿는 것과 똑같은 오류일는지 모른다.
위험한 것은 지나친 자신감이요 낙관이다. 더 위험한 것은 독선에의 유혹이다. 「기쁜 날」 「의미 있는 날」에 혹시라도 등보이고 돌아서 가는 친구들이 있다면, 좌절하고 소외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편에 서서 생각을 가다듬는 일도 중요하다. /본사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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