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벗어놓고 뿔뿔이 놀러 나갔던/내 영혼의 단어들이/하나 둘 셋 넷 집으로 돌아와/가지런히 줄을 선다」.오십도 훌쩍 지난 나이에 등단한 설희관(52) 시인의 시어들은 「허물 벗어놓고 나갔던 영혼의 단어들」이다. 오십이년 세월 동안 그는 그 영혼의 언어들을 혼자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시는 삶의 영원한 숙제이며, 시인은 도달할 수만 있다면 꿈 속에서라도 달려가야 할 「아버지 닮기」』였다.
한국일보 사회2부장, 여론독자부장, 문화부장을 거쳐 현 총무국장으로 재직중인 언론인 설씨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원망을 비로소 시로 담아 월간 「현대시학」4월호에 5편이 추천돼 등단했다.
설시인의 아버지는 월북시인 설정식(1912~1953)씨. 함남 단천 출생으로 광주학생운동 가담으로 퇴학당한 후, 연희전문을 거쳐 미국 유니온대학과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번역했던 영문학자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외국문학위원장, 영자신문 「서울타임즈」편집자로 있다 50년 인민군에 입대해 월북, 휴전회담 통역관으로도 나왔던 인물. 시집 「종」 「포도」 「제신의 분노」를 통해 민족정신을 예언자적 메시아사상으로 갈구했던 시인. 임화 등과 함께 대표적 월북문인의 한 사람이지만 결국 북한에 의해 숙청되고 말았던 비극의 인물.
『설정식에게 민족개념은 가장 원초적인 관념이어서 이를 초월하는 관념이 따로 있을 수 없다』(문학평론가 김윤식).
설희관 시인의 시작은 바로 얼굴도 기억 못하는 때 헤어졌던 아버지로 대표되는, 비극적 현대사로 굴곡된 우리 가족사에서 출발한다. 「사촌누이네 앨범 속에서/63년 긴 세월 묻혀지내던/부모님 결혼사진 한 장/아침 저녁 나를 물끄러미 본다/환갑 위아래 된 두 형과 할머니 된 누이/어떻게 사느냐고 묻기라도 하듯」(「63년 전 사진」부분). 동네 목욕탕에서 일하며, 참기름도 팔며 4남매를 키우다 2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에 자란 형제들은 그러나 50여년 세월동안 아버지의 이야기를 입밖에 낼 수도 없었다. 설시인은 자신의 시작을 「붉은 잉크 들고 종로구청 찾아가 가출노인 이제사 돌아오셨다고 신고」하는 일에 다름아니라고 또 다른 시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만큼 시인의 가슴은 넉넉하게 가라앉아 오히려 싱싱한 감성으로 빛난다. 자연과 일상에 대한 관조를 통해서이다. 「나는 이렇게 늙어가는데도/아침이면 놀러오는 햇살무리는/어릴 때 손거울 드나들면서/장독대 앞 마당에서 나하고 놀던/바로 그 친구들로 변함이 없다」(「햇살무리」부분). 이성부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설씨의 시는 월북시인의 친혈육이 시인의 업을 이었다는 문학사적 의미와 함께, 시의 본질에 충실하고 자기 감성에 철저하게 반응하려는 천진무구함으로 놀라운 시적 감수성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설시인은 『열심히 써서 몇 권의 시집과 가난만을 물려준 아버지의 그림자나마 밟고 싶다』고 겸양했다. 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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