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경순·주부·경기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얼마 전부터 큰 마음을 먹고 요리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덕분에 음식솜씨가 약간 나아져 고2 딸과 중2 아들아이의 도시락 반찬이 교실에서 가장 인기있는 반찬이 되었고 바싹 말라서 고민이던 딸아이의 볼이 통통해지고 발그레해진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만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하루에 다섯 시간이 넘도록 부엌에서 맨손으로 양념을 만지고 물일을 하다보니 그만 손등과 손바닥이 온통 주부습진으로 상해버렸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물론이고 남보기에도 창피했다. 스타킹을 신으려 해도 거칠어진 손때문에 코가 팍팍 나갈 정도였다.
어제는 그 손으로 쓰레기통을 치우고 있었다. TV를 보던 남편이 깜짝 놀라면서 쓰레기통을 빼앗는 것이었다. 『귀한 손으로 쓰레기를 치우냐, 내가 치울게』. 순간 나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쓰레기를 같이 치운 남편은 슈퍼에 가서 하얀 면장갑을 다섯 켤레나 사주면서 『주부습진에는 꼭 면장갑을 껴야 돼』라며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부끄러움에 항상 손을 감추고 다니던 것을 눈여겨 보았던 남편이 너무 고마웠고 괜스레 콧등이 시큰해졌다.
결혼해서 17년 동안 말이 없고 무뚝뚝하기만 했던 남편은 엉망이 된 내 손을 꼭 잡아주면서 토마스 모어의 시를 들려주었다.
「믿어주소서/ 나 지금 흥겹게 바라보는 그대의 젊은 매력/ 장차 시들어 선녀의 선물인양 내 품속에서/ 안개처럼 사라져 없어진대도/ 나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 그 어느 세월인들 변함있으랴」
연애할 때 즐겨 들려주던 이 시를 다시 읊으면서 남편은 내 거친 손을 귀한 손이라고 불러주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세상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단한 삶을 사는 것이 정녕 아닐진대도 난 어제 남편과 같이 밤길을 걸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됐다.
음식솜씨가 아직은 시원찮아 이 손으로 무얼 만들어줘도 안먹을 것 같은 데도 「귀한 손」이라 불러주고 따뜻이 잡아주는 남편의 손이 나를 행복한 여자로 만드는 것이다.
오늘은 둘째를 위해서 진달래 꽃잎을 예쁘게 넣어서 화전을, 남편을 위해 얼큰한 생태찌개와 새콤한 도라지무침을 만들어 봄을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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