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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여자도 인간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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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여자도 인간이외다"

입력
1999.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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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수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정월(晶月). 시흥·용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 나지정은 5남매 중 3남1녀를 일본에 유학보냈다. 진명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나혜석은 1913년 동경여자 미술전문학교 양화과에 입학, 여성으로는 최초의 서양화 유학생이 된다. 1921년 서울에서 가진 첫 개인전은 장안의 화제였다.1920년 당시 변호사였던 김우영(후에 외교관이 된다)과 결혼, 1년반동안 남편과 함께 유럽, 미국 등지를 여행하며 서구 문물을 익혔다. 1931년 이혼 후 사회의 냉대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심신이 피폐, 신경쇠약증세를 보였다. 48년 12월 10일 서울의 한 시립병원 무연고자병동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52세였다. 시신을 거두어 준 사람이 없어 무덤도 알려져 있지 않다.

불꽃처럼 살다간 신여성 나혜석.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1896~1948)은 낯설지 않은 이름이면서 여전히 베일 속에 가리워진 인물이다.

사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근대사회 여명기에 기존의 봉건질서에 대항해 치열하게 살다간 한 「자유여성」정도다.

약혼자였던 최승구(시인)가 사망한 후 도쿄(東京)유학중 사귄 김우영(외교관)이 청혼하자 약혼자의 무덤에 석비를 세워줄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던 여자, 결혼 후 남편과의 프랑스 여행에서 최린(천도교지도자·3·1운동 33인)과의 연애사건으로 이혼당했던 여자, 당당하게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왜 여자에게만 정조라는 것이 강요돼야 하느냐며 사회에 대들었던 여자, 김우영과의 이혼 뒤엔 최린에게 정조유린의 책임을 물어 「위자료」를 내라며 소송을 건 여자….

나혜석 바로알리기 세미나

그러나 최근 나혜석을 「자유여성」에서 「선각자」로 재조명하는 학자들의 연구작업이 활발하게 일고 있다. 27일 오전 10시 수원 경기도문화예술회관에서는 「나혜석 바로 알리기 제1회 국제 심포지엄」이 열린다. 미술사학자인 유홍준 영남대 교수가 특별강연을 하고, 윤범모(경원대), 안숙원(인제대), 최홍규(경기대) 교수 외에 일본 무사시노 여자대학의 이노우에 가즈에(井上和枝) 교수도 주제를 발표한다

나혜석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소설가이자 시인, 최초의 여권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17일엔 한국근대미술사학회 주최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로서의 나혜석을 조명하는 세미나가 열리기도 했다.

새로운 관점과 평가

무엇보다 학자들이 나혜석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용기있고 진보적이며 당당한 모습의 「신여성」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유홍준 교수는 『나혜석은 단지 너무나 일찍이 주장하고 행동했을 뿐』이라면서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그에게 동의하거나 동조할 수 없었겠지만 역사의 흐름은 결국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조선 남성 심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앗으려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린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1934년 이혼고백서).

뜨거운 민족애의 소유자

그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열망했던 투철한 인간애의 소유자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 일경에 체포돼 5개월동안 투옥생활을 했으며 1923년 3월엔 만주로 전근갔던 남편 김우영과 함께 「의열단의 폭탄 반입사건」 주동자들이 거사를 성공하도록 직·간접적으로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최홍규 교수는 『의열단 사건에서 그가 보여준 결연한 행동과 민족의식은 다시 평가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작품과 작품 세계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이자 1921년 최초의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나혜석의 것으로 전해오고 있는 작품은 10여점 가량. 윤범모 경원대 미술대 교수는 『유존작 거의 대부분이 태작인데다 상당수 작품이 진위여부 등 출처를 의심받고 있다』고 말했다. 나혜석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나부」(호암미술관 소장)는 일본 구메 게이치로(久米桂一郞)의 모사화로 판명났다.

그러나 최근 윤교수는 당시 자료를 통해 60여점 가량을 더 확인했다. 『매일신보를 찾아본 결과 1910년대 초기그림에서 그가 범상치 않은 필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동식당에서」 「계명구락부에서」 「경성역에서」등 소묘(목판화라는 주장도 있음)는 그의 조형감각을 엿볼 수 있는 수작이라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선각자적 여성의식이 화폭에 담기지는 않았다는 점. 개인적 역량이나 시대적 분위기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초의 여류소설가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그는 최초의 여류소설가로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숙원 교수는 『그의 소설 「경희」는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텍스트』라고 평가하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신여성론은 동시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맞겨룰만한 담론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여성도 「사람」의 대우를 받아야한다는 여성계몽적 시 「노라」를 발표, 1910년대 계몽주의 문학의 중요작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상경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교수는 『나혜석은 자유연애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성취를 추구하며 온몸으로 계몽주의 사상을 밀고 나갔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영광과 비난, 이상과 현실, 사랑과 증오,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겪으며 살았던 드라마틱한 인생. 이제 나혜석을 최초의 「노라」, 특별했던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가장 「인간다웠던」 인물로, 그리고 진보적 사회사상가로, 스스로 실천적인 여성해방운동을 펼쳤던 선각자로 재평가해야 할 때라고 나혜석 연구가들은 말하고 있다.

/송영주기자 yj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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