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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의 한순간] 5. 장석남 `마당에 배를 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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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의 한순간] 5. 장석남 `마당에 배를 매다'

입력
1999.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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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맞는 봄임에도 들판가에 서 있는 나무들에서 꽃이 피기 시작하면 마치 이 세상에 와서 처음 보는 것인양 새삼스런 경이로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가령 꽃이 만발한 살구나무 아래라도 지날라 치면 가슴이 그 살구나무만큼 커져서 터질 것만 같다. 좀 과장이지만 그렇게밖에 달리 말하고 싶지 않다.그렇게 한 순간 덧난 가슴은 그러나 시간의 힘으로 곱게 치유된다. 애초에 아픈 상처가 아니므로 그 흉터마저 감미롭다. 한두 번의 빗발이 지나고 나면 꽃은 지고 그 꽃자리에 조금씩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조용한 밀물 같다. 그 밀물을 타고 배가 한 척 들어오고 있었다.

작년 초여름이었다. 무언가 내 생에서 한번쯤 마디가 지어져야 할 듯 싶었다. 왜 사람에게는 삶을 좀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날 때가 있지 않은가.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라는 스스로에 대한 의구 말이다. 좀 거창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내가 삶을 수용하는 방식의 문제였다. 그러던 차에 어느 집 마당가에 앉아있게 되었다. 저물녘이었다. 마당가 우거진 숲에 제일 먼저 어둠이 깃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태우러 온 배(船)와도 같았다. 문득 나는 내가 지금 배를 매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일생은 흔히 사계로 비유된다. 나는 지금 내 생의 어디쯤 와 있는가. 녹음 가득한 배가 내 앞에 있었다. 시간이라는 심연의 배.

「마당에 녹음 가득한/배를 매다//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끝에/몇 포기 저녁 별/연필 깎는 소리처럼/떠서//이 세상에 온 모든 생들/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가슴속에 쌓고 있는가//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영혼/혹은,/갈증//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곧 오리라//오, 사랑해야 하리/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뒷모습들」

배를 타고 저 마당 끝쯤에 떠 있는 별에게까지 가는 것이 우리들의 생인지 모른다. 그 도정의 풍경을 우리는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그것은 일종의 갈증이다. 그 갈증 때문에 시를 쓰거나 혹은 선(禪)에 들거나 하는 것이 아닌가. 배는 울렁이며 아직 마당가에 매어져있다./시인·제44회 현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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