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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사람] 허정.장면정부때 검찰총장 이태희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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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사람] 허정.장면정부때 검찰총장 이태희변호사

입력
1999.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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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는 왜 찾소, 농담으로 전화한 줄 알았는데』4·19혁명후 허정 과도정부와 장면 정부시절 검찰총장을 지낸 이태희(88)변호사. 9개월간의 짧은 검찰총수 생활이었지만 당시 그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현장에 서 있었다. 4·19발포명령자, 장면부통령저격, 정치깡패, 고대생 피습사건 등 초미의 관심을 끌었던 7대 사건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갔다. 검찰은 관련 피고들에게 사형, 무기 등 중형을 구형했으나 관대한 형량의 10·8판결이 내려지자 정국은 크게 들끓었다. 이후 「민주반역자처리법」이 공포되면서 이총장은 10·8판결로 풀려나왔던 혁명사범들을 다시 붙잡아들이는 역할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검찰은 검찰대로, 법원은 법원대로 소신을 갖고 일하는 것이지요』 라며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는 침묵한 그는 대신 『4·19때 변호사를 하며 서울 종로구 당주동의 한옥에 살았는데 집주위에서 총소리가 심하게 났습니다. 때문에 아이들이 다니는 서울대와 경기고까지 직접 찾아가 데려왔습니다』라고 가족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의 인생역정은 5·16과 함께 또 다른 전기를 맞는다. 5·16직전 그는 「세간에 혁명루머가 나돈다」는 정보를 듣고 그 소문을 퍼뜨린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를 조사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혁명은 일어났고 그는 그 피의자로부터 『자, 보시오. 내말이 맞지 않소』라는 말을 들으며 곧바로 투옥됐다. 반혁명분자가 아니냐는 혐의였다.

『소식도 없이 끌려가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남편소식을 전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부인 김성은(金聖恩·84)씨가 말을 거든다. 이변호사는 『처음에는 뇌물을 받았다고 누명을 씌우더군요. 그러나 수사관들이 어려운 가정살림을 보고 빨갱이라고 몰아 부쳤습니다』. 부인은 『혐의가 공산주의자로 바뀌는 것을 보고 죽지는 않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고 회고한다. 그는 7개월여의 옥고 끝에 무죄로 석방됐다. 한국재판사상 첫 공소취하였다. 그의 청렴함도 작용했지만 미국 유학시절 은사 로버트 스토리박사(전텍사스대 총장)의 도움도 컸다. 스토리박사는 수감소식을 듣고 직접 한국까지 찾아와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장군을 만나는 등 백방의 노력을 폈다.

출감후 그는 박정희장군측의 용산구 국회의원 출마권유를 뿌리치고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정부에서 미워하는 변호사라는 낙인이 찍혀 변호사생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변호사가 돈 많이 번다는 얘기는 제게는 해당이 안되죠』. 법조인으로서 평탄치 않은 시련을 겪어서인지 자녀들중 법조인은 없다. 첫째 대황(大皇)과 둘째 대우가 모두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지만 그는 고시에 도전하는 것조차 말렸다. 셋째 대철(大徹)과 딸 희영 등 네 자녀가 건강하게 자라준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이씨는 요즘 장안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거의 매일 사무실에 나갈 정도로 노익장을 자랑한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말씀이 새겨진 액자를 가리키며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글 박원식기자 parky@hk.co.kr 사진 김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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