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고 미얄코비치기자 본보에 E메일 제2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신유고연방에 공습 이후 한국일보에 베오그라드의 상황을 E_메일(4월 13일자 13면)로 전하고 있는 유고 폴리티카(POLITICA)지의 알렉산드라 미얄코비치 기자가 16일 2보를 보내왔다.
그는 『지난 이틀밤 베오그라드에 폭격이 가해진 탓에 E_메일을 띄우기가 여의치 않았다』며 본보 기자의 질의에 대한 답변을 통해 공습 이후 유고 국민들의 변화된 삶을 전했다. 폴리티카지는 유고의 최대 일간지로 미얄코비치 기자는 이 신문에서 18년간 정치분야를 맡아왔다.
- 공습이 3주를 넘고 있다. 유고 국민들은 아직도 나토에 대항해 싸울 의사가 있는가.
『국민 정서는 공습 첫날과 비교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유고국민들은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침략자들에 대항해 용기와 과감성, 스스로에 대한 존엄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토와 미국은 이른바 유고군의 알바니아계 학살을 방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들의 폭격이야말로 세르비아와 알바니아계, 이웃국가 모두에게 엄청난 재난을 안겨 주었다. 그중에서도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최대의 희생자다. 그들은 코소보해방군(KLM) 등 알바니아계 분리주의자와 테리리스트들에 의해 고통당했고, 유고군에게 쫓겨다녔고, 마침내는 나토의 폭격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번 전쟁을 비록 작고 약한 국가라고 해도 강대국들의 침략에 맞서 독립을 수호할 권리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이는 역사상 오스만 투르크, 히틀러, 스탈린 등 무수한 침략자들에 맞서며 일관되게 우리가 적용해온 원리이다』
- 유고 국민들의 일상적 삶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아침 일찍 빵과 버터를 사기 위해 쇼핑을 하고, 정거장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버스나 전차를 타고 일하러 간다. 극장들은 매일 문을 열고, 입장은 무료지만 마지막 공연은 오후 5시다. 전처럼 풍족한 밤 생활은 더이상 없지만 낮이면 레스토랑과 커피숍은 여전히 꽉 찬다. 사회적 모임은 대피소내의 장기 야간대기로 대체됐다. 베오그라드와 대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행사는 반전 노래를 부르는 콘서트다. 사람들은 전에 없이 정치적으로 뭉쳐 그들의 강한 항의를 나타낸다. 96년 밀로셰비치 정권에 반대해서 3개월간이나 항의시위를 벌였던 그 사람들이 지금은 세계대전 때 세르비아의 연합국이었던 영국, 프랑스의 문화센터 빌딩 유리를 깨고 미국 국기를 불태우고 있다』
- 암시장이 활개치는 등 경제생활의 혼란은 없나.
『유고에는 공습이전 대단히 발달된 암시장이 있었다. 유엔 제제(1992-96년)로 인해 암시장은 생필품 공급 창구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습이후 암시장은 사라졌고, 물가도 오르지 않았다. 정부는 공습이후 어떤 불법 경제활동에도 가혹한 처벌을 가한다. 전쟁을 이용한 모리배들은 즉각 체포되고 엄하게 처벌된다. 디나르화의 가치는 독일 마르크화에 비해 20% 가량 떨어졌다. 가게에는 아직도 충분한 음식이 있고, 시민들은 인내심을 갖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 농업국가인 유고는 자급자족할 수 있다. 나토가 지금까지 화학공장의 3분의 2와 연료저장소 대부분을 파괴해 가솔린이 가장 부족한 품목이 됐지만, 아무도 경제제재 때처럼 가솔린을 길거리에서 팔지는 않는다. 담배산업도 심하게 타격을 입었고 담배도 귀해졌지만 요즘 우리는 금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농담을 하고 있다』
- 유고의 저널리스트들은 공습이후 어떤 식으로 활동하고 있나.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언론인들도 전쟁스케줄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공습중에도 사무실에 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우리 아이가 있는 지역에서 폭발음이 울려도, 자리에 앉아 기사를 마쳐야 한다는 사실이 어머니인 나로서는 매우 견디기 힘든 일이다. 평상시의 일반적인 주제들은 보류된 상태고, 각자의 언론인들은 자기의 전문적인 영역에서 지금의 상황을 탐색하려 노력하고 있다. 공습전 다양하던 미디어간의 차이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비공식적이지만 전시 검열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독립언론은 정부가 패쇄시켰고 수백개의 민영 TV, 라디오 방송국은 세르비아 국영뉴스를 재방송할 뿐이다. 기자나 직원들이 징집당하는 바람에 방송국중 일부는 프로그램을 축소했다. 지난 며칠동안의 공습으로 TV, 라디오 전송시설의 상당수가 파괴됐기 때문에 국내 선무방송이 외국의 방송전파로 대체되기도 했다. 폴리티카지는 기존 섹션을 그대로 발행하고 주말판도 만들지만 다른 많은 신문들이 종이 부족으로 지면을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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