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윤기(52)씨는 절친한 이들한테 술 한 잔 하자고 권유할 때 『우리 한 번, 흐릅시다』라고 말한다. 이씨는 새로 낸 에세이집 「어른의 학교」(민음사 발행)에 이런 이야기를 써놓았다. 「어찌하면 심산유곡에서 빠져나갈 수 있느냐고 묻는 객승에게, 바위 위에서 좌선 삼매에 빠져있던 어느 선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_따라 흘러가오」. 「어른의 학교」는 그의 정신의 흐름의 기록이다. 늘 유유하면서도 때로는 바윗구비를 세차게 휘감고 돌아가는, 인문적 교양의 흐름이다.그 흐름을 더욱 값지게 만든 것은 세 사람의 40여년 우정이다.
「어른의 학교」는 이씨가 내용을 썼지만, 그와 중학교 동기동창으로 함께 교지를 편집하고 삽화를 그렸던 정재규(50) 화백이 그림을 그렸고, 정화백의 형으로 이씨와 출판계 일을 오랫동안 함께 해 온 북디자이너 정병규(52)씨가 책 꼴을 만들었다. 정병규씨가 추사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멋들어진 표지제목 아래에는 「글쓴 이 이윤기, 그린 이 정재규, 꾸민 이 정병규」라고 나란히 인쇄돼 있다.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인세도 아예 삼분하기로 했지요』라며 이들은 웃었다. 요즘은 참으로 귀한 해박한 인문학 교양을 맛깔스럽게 유머 넘치는 문체로 풀어놓은 이씨의 글에, 굵은 붓으로 무심하게 아무렇게나 척척 휘갈긴듯 하지만 글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정재규씨의 수묵화, 정평있는 정병규씨의 디자인이 한 권의 책을 그 자체로 멋있게 만들었다. 시·서·화가 어우러졌던 우리의 문사 전통을 생각나게도 한다.
정병규씨는 『일본에서는 북디자인을 도서설계(圖書設計)라고 이야기합니다. 책도 이제는 그 자체 시각적 운율(visual poetry)이 부여되는, 문자문화의 개념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른의 학교」는 「21세기의 문인화」 한 편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오래도록 주물렀던 책입니다』라고 털어놓았다. 두 사람은 책이 나온 후 만나 서로에게 오랜 우정의 「짠한 마음」을 이야기했지만, 정재규화백은 파리에 체류중이라 아쉬웠다.
이씨는 왕휘지의 고사를 통해 에세이를 쓰는 심정을 이야기한다. 왕휘지가 눈 내리는 밤에 친구가 그리워 밤새 사공에게 배를 젓게 해 친구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새벽녘에 친구 집 앞에 이르러 그냥 돌아가자고 한다. 사공이 이유를 물었다.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을 타고 돌아갈뿐』이라고 왕휘지는 대답했다. 그런 흥으로,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살아버리면서」쓴 글이 이씨의 글이다.
32편의 에세이는 미국 미시건주립대 사회과학대학 리서치펠로인 이씨가 미국에서 겪은 일들, 일본노래의 표절이면서도 버젓이 아직도 불려지고 있는 가요를 보고 느낀 점 등 우리 문화현상에 대한 시평 형식의 글, 생활 주변의 일상에 대한 반성이 글마다 고사(故事)와 선화(禪話), 동서고금의 명문을 통해 녹아있다.
이씨는 『「대인은 살고 소인은 쓴다」고 하는데 나는 굳이 써놓기를 좋아하고 책을 묶어내니 아직 소인인가 보다』면서도 『글은 늘 새로워야 한다. 젊은 친구들이 행간의 뜻을 각자 맛있게 빼먹을 수 있도록 「압축파일」을 던져주는 것이 그래도 나이먹어 글쓰는 사람의 할 일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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