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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조국광복회와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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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조국광복회와 김일성

입력
1999.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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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광복회운동은 해방 후 북한지도부를 구성한 인물들이 주도한 운동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운동은 민족해방운동사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국광복회는 좌우합작의 통일전선을 지향한 지하 항일조직으로 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주도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즉, 물리력과 결합한 최초의 통일전선조직이었던 것이다. 1937년 6월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 병력 100명의 국내진공작전으로 이루어진 보천보전투에서도 조국광복회 국내조직이 연관되어 있었다.조국광복회 운동은 민족운동의 암흑기로 일제의 탄압이 절정에 달했던 1930년대 후반에 전개됐다. 1936년 5월에 창설돼 1938년 말에 와해된 이 조직의 활동과 규모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으로는 갑산 혜산 등 함경남도 북부지방과 압록강 건너편인 중국 장백지방의 조국광복회 회원 739명이 검거된 「혜산사건」관련 취조문서와 법원 판결서등이 있다. 이 사건은 그 배후에 김일성의 항일유격대가 개입돼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민족해방운동사에서 보기드문 대사건이었다. 이는 일제의 함흥지방법원이 1941년 8월에 2명의 옥사자를 제외한 168명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이중 6명에게 사형, 5명에게 무기징역, 38명에게 10년이상 중형을 언도한데서 잘 드러난다. 일제는 이 사건 피의자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공백상태에 있던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서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밀지하조직이었던 조국광복회는 1927년 결성된 신간회처럼 광범한 우파인사들을 망라하지는 못했다. 대체로 민족주의 계열의 조직적 참여는 천도교의 지방조직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조국광복회의 명칭, 조직범위, 발기인, 주도세력 등을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논쟁이 그치지 않고있다. 조직의 명칭에 대해 「재만한인조국광복회」 「조선조국광복회」등 여러가지 자료가 나오고 있으며 설도 분분하나 대체로 당시 현지사정에 맞게 조국광복회 앞에 「재만」「조선」등의 수식어를 붙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조직 범위의 경우 북한에서는 만주전역은 물론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발굴된 일제자료에는 주로 함남북부지방과 중국의 장백현 일대로 국한돼 있다. 그런데 최근 발굴된 중국측 자료들은 이 조직이 만주일원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항일유격부대에 비교적 광범하게 설립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전체라는 주장은 과장으로 판단되나, 만주지역의 조선인 집거지역에 부분적으로 이 조직이 결성됐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조국광복회 발기인과 관련해서는 김일성이 발기인에 들어있었는가 하는 점이논쟁거리. 현재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김동명이라는 가명을 쓰고 발기인에 참여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이를 뒷받침할 만한 일제관헌자료나 중국측 자료는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김일성이 조국광복회운동을 주도한 것은 입증됐다. 「혜산사건」관련 취조문서와 법원판결서는 이 조직을 주도하고 책임을 진 인물이 항일연군 제6사 사장 김일성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국광복회운동은 1935년의 국제공산당(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채택된 반파시즘인민전선의 테제를 식민지 국가인 조선에 적용하면서 전개한 것이다. 당시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이 해산되고 없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 산하에서 항일유격대활동을 전개중이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일제에 대항하여 반제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지시했다. 때마침 만주에서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선해방」을 자신들의 직접적인 사명으로 하려는 의지를 보이면서, 그들을 「중국혁명」에 종속시키려는 중국공산주의자들과 긴장관계가 조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반제민족통일전선 형성지침을 환영했으며 그 일환으로 조국광복회를 조직한 것이다.

조국광복회운동의 주도권은 만주에서 조선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동만지역(현재의 연변지방)에 근거를 둔 항일유격대에게 돌아갔으며 그 결과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제6사가 이 조직의 책임부대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김일성의 항일유격대는 일제토벌에 쫓겨 남만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부대는 유격활동에 적합한 지형을 갖추고 있고, 조선인이 다수 거주하고 조선에서도 가까운 장백지구로 진출해 조국광복회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조국광복회운동은 여기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해방후 북한의 지도부로 자리잡았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김일성 등이 주축을 이룬 항일유격대가 북한의 중추지도부를 구성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북한에서 김정일과 함께 원수직을 유지하고 있는 이을설 호위총사령관을 비롯, 전문섭 김성국 등 북한의 고위인사를 지낸 인물들도 당시 항일유격대에 입대했다.

이와함께 조국광복회에 참여한 지방공산주의자들도 뒤에 북한지도부의 일원이 됐다. 김일성은 조국광복회 확대작업을 주도하면서 함남 북부지방의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를 맺게 되었는데 박달과 박금철 등이 이들이다. 이들은 1937년과 1938년에 한인민족해방운동 조직을 만들어 김일성과 연계를 가지며 조국광복회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혜산사건」으로 구속된 후, 광복과 함께 감옥에서 나와 북한혁명에 참가했다.

광복 당시 무기수였던 박달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반신불수 상태로 나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가 월북, 북한의 영웅이 됐다. 역시 같은 무기수였던 박금철도 감옥에서 나와 월북했다. 「갑산파」로 불렸던 이들 조국광복회 국내조직 출신들은 북한의 국가형성과정에서 시종일관 김일성을 지지하는 중요한 옹위세력이 됐다. 그러나 이들은 1967년 김일성 개인숭배가 전면화되고 1인절대권력체제가 확립되는 일대 소용돌이 속에서 모두 숙청되고 말았다. 당시 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자 권력서열 4위, 5위였던 박금철 이효순을 포함해 허석선 김왈룡 이송운 허학송 등 고위간부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종석·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약력

58년 남양주 출생 93년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박사 저서 「분단시대의 통일학」「현대북한의 이해:사상·체제·지도자」「조선로동당연구-지도사상과 구조변화를 중심으로」편저「북한의 근로단체연구」논문「북한지도집단과 항일무장투쟁」「한인공산주의운동의 전개과정」「북한의 정치와 사회」등

조국광복회연구자료

신주백「만주지역한인의 민족운동사연구(1925~40)」(성균관대 박사논문·96) 와다 하루키, 이종석 역「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창작과 비평·92) 허동찬「재만한인 조국광복회 선언과 강령의 성립경위」(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89) 서대숙「김일성의 항일투쟁, 사실과 과장」(신동아·89) 이준식「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한길사·89) 백동현「한인조국광복회운동에 관한 연구」(고려대 석사논문·93년) 이명영「재만한인공산주의운동 연구」(성균관대출판부·75)

*[현대사 다시쓴다] 김일성은 가짜인가 진짜인가

북한의 김일성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올랐던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경력에 대해서 학계서는 80년대 말을 고비로 「진짜」라는 주장이 많아지고 있다.

김일성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던 시절에 나왔던 「가짜 김일성론」은 김일성이 여러 명이라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가짜 김일성론」을 제기한 이명영 전성균관대교수는 74년 펴낸 「김일성열전」에서 『중국공산당 유격대장 김일성과 북한의 김일성이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방대한 일제문헌을 고찰한 그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을 지낸 제1대 김일성은 37년 무송현에서 전사했고, 제2방면 군장이었던 제2대 김일성은 44년을 전후해 소련에서 죽었다』며 『북한의 김일성은 보통 빨치산 출신으로 광복 후 내려온 김성주』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미국에서 북한을 연구해온 학자들과 일본의 와다하루키(和田春樹)교수 등은 진작부터 김일성의 항일투쟁경력을 대체로 인정했다. 특히 88년 미국에서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을 펴낸 서대숙 하와이대교수는 서울을 방문한 자리에서 『남한에 널리 퍼진 「가짜 김일성론」은 정치적으로 오염된 말』이라며 「가짜 김일성론」을 일축,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은 다양한 문헌들을 통해 「가짜 김일성론」이 문제가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먼저 일제의 관헌자료인 「사상휘보」에 『동북항일연군 제6사의 사장인 김일성은 평남 대동군 고평면 출신으로 본명이 김성주이고 29세』라는 귀절은 북한 김일성의 신원을 확인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중국문헌에 제6사장이나 제2방면 군장 자리가 일관되게 공란으로 처리된 것은 중국공산당 휘하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북한의 입장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지 김일성의 항일활동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90년 이후 공란에 일제히 김일성의 실명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북한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다.

김일성 정체 문제를 지속적으로 연구해 온 한 학자는 『김일성의 정체규명은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북한체제를 정확히 알고 대북정책을 올바로 세울 수 있는 기본전제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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