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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만에 빛보는 한국판 '안네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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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만에 빛보는 한국판 '안네의 일기'

입력
1999.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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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의 습관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할머니의 팔을 베고 날씨와 일제시대 이야기를 듣던 손녀는 어느날 할머니의 유물가방에서 낡은 일기장 한권을 들춰냈다.

일기장 속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차장과 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장을 역임한 양우조(楊宇朝·1897~1964)선생과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위원이자 애국부인회를 재건한 최선화(崔善嬅·88)여사 부부의 애절한 사랑과 고난, 2차 세계대전과 중일전쟁 시절 처절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빛바랜 사진과 함께 담겨있었다. 최씨의 외손녀 김현주(金賢珠·26·방송작가)씨는 할머니의 흐릿한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어 「제시(濟始)의 일기-그래도 독립운동은 계속됐고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를 임정수립 80주년(13일)을 맞아 책으로 엮어 이달중 출간할 예정이다.

연필로 눌러 쓴 조부모의 독백을 활자로 옮긴 김씨는 『어려운 시절 「조국독립」이라는 희망 하나로 삶을 격려하고 채찍질하며 그 시절을 담담하게 기록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숙연했다』고 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일제 후반기 독립운동의 역사를 일기형식으로 말해주는 유일한 사료이자 독립운동가 부부의 따뜻한 가족사』라고 말했다.

한국판 「안네의 일기」는 이화여전을 나온 스물여덟 젊은 신여성과 마흔 둘 독립투사 남편이 갓 태어난 맏딸 제시를 안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포성과 화염이 자욱한 이국땅을 떠도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1938년 7월4일. 중국 후이난(湖南)성 창사(長沙). 300여명의 임시정부 식구들이 목선을 타고 지난해 12월 장시에 도착했고 우리 부부도 합류했다. 그리고 오늘 내딸 「제시」를 처음 가슴에 안았다. 빼앗긴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 그 아기가 자랐을 때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제 몫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계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있는 한국인으로 활약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이름을 지었다」. 일기의 첫장은 딸에게 제시(濟始)라는 영어식 이름을 지어주면서 조국 독립을 생각한 선각자 부부의 마음이 묻어난다.

몇번이고 피난보따리를 싸면서도 할머니가 목숨처럼 간직해온 일기 속에는 김구(金九)선생의 무릎 위에서 자라는 「제시」의 모습과 당시 중국에 있던 한국 동포들의 생활과 따뜻한 정이 그려져 있다. 또 임정의 활동과 행로, 그 안에 몸담고 고민했던 한 학자풍 독립운동가 부부의 정서적 체험과 인생이 내면의 독백으로 담겨 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햐얀 쪽배를…」을 옹알거리는 어린 딸을 보며 타향의 하늘아래서 유랑했던 임정요원들의 아픔도 군데군데 깔려 있다.

1945년 8월15일 광복. 일기는 의외로 「착잡한 마음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일기는 연합군의 승인을 받지 못한 정부였기에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했던 임정 가족들이 46년 5월4일 배를 타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 부산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일기 속 주인공 제시(61)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서강대에서 교편을 잡았고 서울국제부인회(SIWA)부회장을 역임한 중년 부인이 됐다.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은 양우조선생은 올해 「9월의 인물」로 선정됐고, 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최선화여사는 『그분들의 넋이 잊혀진 이야기로 묻혀지는 것이 안타깝다』며 수많은 독립운동 유품과 사료들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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