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입사시험에 합격하고도 임용취소로 실직상태에 있던 「상실세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죽음이었다.95년 서울 H대 기계설계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모(27·서울 은평구 응암3동)씨는 전도양양한 젊은이였다. 1남2녀중 외아들인 이씨는 공군장교로 2년여를 복무한 뒤 대기업인 H건설에 당당히 합격,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젊은 공학도의 꿈은 IMF이후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첫 직장인 H건설을 다닌지 10개월만에 회사가 부도가 날 때까지만 해도 이씨는 여전히 내심 자신만만했고 지난해 다시 130대 1의 경쟁을 뚫고 대기업인 L그룹 공채에 합격했다. 흥분된 마음으로 첫 출근을 손꼽아 기다리길 수개월. 하지만 이씨는 임용이 취소됐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후 이씨의 방황이 시작됐다. 외아들로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온 이씨는 5~6군데에 계속 입사원서를 냈지만 연거푸 고배를 마시자 최근엔 한달넘게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지난 2일 28년간 공무원을 천직으로 알고 성실하게 살아온 아버지(59)마저 조기퇴직 통보를 받았다.
고민하던 이씨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듯 다음날 집을 나섰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죽음. 이씨는 4일 오후 4시40분께 서울 종로구 장사동 C호텔 718호실에서 욕실 문고리에 천으로 목을 맨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씨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것은 「집으로 연락해 주세요」라는 메모와 빈 맥주캔 3개, 그리고 구인·구직정보가 꼼꼼하게 적혀있는 수첩 한 권 뿐이었다.
졸지에 외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5일 밤 서울 S병원 영안실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만 쳐다보았다.
박천호기자 chpark@hk.co.kr
(C) COPYRIGHT 1999 THE
HANKOOKILBO
(C) COPYRIGHT 1998 THE HANKOOKILBO -
KOREALINK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