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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독립운동사의 쾌거, 이봉창.윤봉길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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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독립운동사의 쾌거, 이봉창.윤봉길 의거

입력
1999.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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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하늘을 찌를 듯 날뛰고 있었다. 그 포효하는 소리와 기세를 단숨에 잠재운 거사가 1932년 1월과 4월에 있었던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의거다.1931년 7월 만주 장춘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농민과 중국농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일본은 이를 악용하여 양 국민을 이간질했다. 국내에서는 중국교민을 박해하도록, 중국에서는 한국독립운동이 설 자리를 잃도록 각각 유도했다. 게다가 두달 뒤 일본 육군 군벌은 만주를 침공, 만주지역 동포사회와 독립운동계를 유린했다.

임시정부는 위축된 독립 운동에 기를 불어넣기 위해 특단의 전략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가 있을 뿐.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바로 준비된 인물이었다. 그는 자금 마련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미주 동포들에게 거사에 필요한 성금을 보내달라는 간곡한 서신을 계속 보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미주 동포들이 적은 액수이지만 조금씩 송금해왔다. 그는 이 돈을 내복 속에 넣고 아예 꿰매버렸다. 쉽게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자금이 마련되는 동안 그에게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합니다』 1931년 초 이봉창이 백범을 만나 털어놓은 말이다. 일본에서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란 이름으로 철공소 직공으로 일했던 그는 우리말도 반은 일본식 발음이어서 「일본인 영감」으로 불리고 있었다.

임시정부 주변에서 의구심의 대상이던 그를 김구는 거사 적임자로 꿰뚫어 보았다. 김구는 1931년 12월말 그를 도쿄(東京)에 파견하기로 작정했다. 출발에 앞서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에 가입선서를 했다. 태극기를 배경으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양복 앞가슴에 커다랗게 선서문을 붙이고 그는 기념 사진을 찍었다. 죽으러 가는 그의 표정이 그토록 밝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일본으로 갔고, 백범은 추가 자금을 송금했다. 김구가 백정선(白貞善)이라는 이름으로 이봉창에게 100엔을 보낸 요코하마 스페시뱅크의 송금영수증이 아직 남아있다.

1월 8일 관병식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오던 일본왕의 승용차에 이봉창은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궁내 대신이 탄 마차 뒷바퀴, 일본왕이 탄 승용차 1㎙ 거리에서 터졌다. 그러나 마차만 뒤집어졌다. 이봉창의 두번째 폭탄은 일왕 차 밑에 떨어졌지만, 불발이었다. 너무나 아쉬운 순간이었다.

체포된 그는 오직 백정선이란 사람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자금을 얻었으며, 김구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물론 백정선은 김구의 가명이다. 이 바람에 일제는 김구를 주범, 이봉창을 종범으로 만들려다 실패하고 말았다.

이봉창 의거에 중국 신문들은 일제히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不幸不中)」고 보도했고, 이에 격분한 상하이(上海) 주둔 일본 해군은 이 신문사들을 습격, 파괴했다. 마침 상하이 주둔 해군은 만주침공을 주도한 육군에게 밀린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해군은 이 보도를 트집잡고 또 일본 승려 피살사건을 조작해 상하이 침공에 나섰다. 여기서 승리했다고 홍코우(虹口) 공원(지금의 루쉰공원)에서 4월 29일 천장절(일본왕 생일) 행사를 떠들썩하게 계획했다.

기고만장한 상하이 주둔 일본군의 기세를 꺾어 놓은 거사가 바로 윤봉길 의거였다. 국내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폈던 윤봉길은 당시 상하이 홍코우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김구에게 『죽을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청했다. 거사 계획을 들은 그는 『이제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라고 말했다. 김구는 중국 병공창에 근무하는 김홍일(金弘壹)에게 일본인이 사용하는 물통과 도시락을 사주고 그 속에 폭탄을 장치하도록 일렀다. 윤봉길은 태극기 앞에서 오른손엔 권총을, 왼손엔 수류탄을 들고, 가슴에는 선서문을 붙이고 한인애국단원으로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이 말은 마치 농부가 밭일 나가는 듯이 태연자약하던 윤봉길에게 던진 김구의 마지막 인사였다.

윤봉길은 이 거사를 통해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해군대장, 민단장 가와바다를 절명시켰다. 또 시게미즈 공사, 노무라 중장(제3함대 사령관), 우에다 중장(제9사단장)에게 중상을 입혔다. 중국인들은 중국군 몇 개 사단을 동원해도 안될 일을 조선 혁명투사 한 사람이 해냈다고 찬양했다.

이 양대 의거는 모든 면에 걸쳐 엄청난 충격이었다. 독립운동계에는 격정을, 중국정부와 중국인들에게는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애정을, 일본에게는 충격을 각각 안겨주었다. 침체된 독립운동계가 다시 소생했다. 국내 신문도 거사 소식을 흥분의 목소리로 연일 보도했다. 미주 동포사회도 흥분의 도가니였다. 장졔스(蔣介石)는 김구를 특별히 보호할 것을 지시했고, 중국 민간단체들은 임시정부에 상당한 성금을 보내왔다. 일본은 이봉창 의거에 이어 큰 충격을 받았다. 김구가 직접 단원을 이끌고 국내로 잠입한다거나, 부하들이 이미 잠입했다는 정보가 나오기도 했다. 허둥대는 일본이 애처로워 보이기조차 한다.

하지만 이봉창·윤봉길 의거만이 한인애국단 활동의 전부는 아니다. 한인애국단은 여러차례 요인 암살을 시도했다. 이덕주(李德柱)와 유진식(兪鎭軾)을 국내로 보내 총독을 암살하려 했고, 유상근(柳相根)과 최흥식(崔興植)을 만주로 보내 관동군 사령관을 죽이고자 했다. 또 김긍호(金兢鎬)라는 여자 요원도 파견됐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실패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단원들이 일경에 검거되고 순국했다. 거사가 실패했다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성공 뒤에 숨은 그늘을 이해하고 가치를 부여할 때 전체적인 윤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김희곤(金喜坤·안동대 사학과 교수)

약력

54년 대구 출생 경북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상하이 지역 한국독립운동단체 연구」로 박사 학위(91년) 미국 하버드대 객원 교수(96∼97년) 저서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9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운동」(공저·95년)

참고문헌

「대한민국임시정부사」(추헌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89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한상도, 문학과지성사, 94년)

「피어린 27년 대한민국임시정부」(목도·木濤·손과지·孫科志, 건국대출판부, 94년)

「독립군의 길따라 대륙을 가다」(조동걸, 지식산업사, 95년)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김희곤, 지식산업사, 95년)

「한국민족운동사연구」(김창수, 범우사, 95년)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위상」(추헌수, 연세대출판부, 95년)

「백범일지」(윤병석 직해, 집문당, 95년)

「근대한국민족운동의 사조」(윤병석, 집문당, 96년)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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