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O 윤치원 견습신판위원 -여덟살바기 여관집 아들 치원에게는 자랑거리가 하나 있었다. 프로야구 OB베어스(현 두산) 선수들에게 맘껏 사인을 받을 수 있는「특혜」.
마산시내에 자리한 한진여관이 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원정경기온 OB선수들의 숙소로 이용되면서부터였다. 「박철순 윤동균 김우열…」. 그중에서도 박철순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다짐했다.「꼭 프로야구 선수가 돼야지」
한국야구위원회(KBO) 견습심판위원 윤치원(25·사진)의 어릴적 꿈은 프로야구 선수였다. 마산 성호초등 4학년때 한살 아래 동생과 나란히 야구부에 지원했다. 유니폼을 입고 글러브를 손에 꼭 맞춰끼고 나면 마음만은 박철순에 윤동균이 되어있었다.
마산중·고를 거쳐 93년 3월, 연세대에 입학했다. 프로 그라운드가 멀지않아 보였다. 그러나 입학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닥친 교통사고. 큰 부상이 아니려니 생각하고 병원을 찾았지만 『대퇴부 근육이 망가졌다』는 의사의 말에 하늘이 「쿵」 무너져 내렸다.
포기하지 않았다. 몇번의 수술을 받더라도 다시 야구만 할 수 있다면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3번의 수술을 받는데 3년이 걸렸다. 『한쪽 다리를 못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이만하면 다행』이라는 주위의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프로선수가 되는 꿈을 접어야 했기때문이다.
체육교사 자격증을 들고 97년 졸업했지만 마음만은 아직 그라운드를 떠날 수 없었다. 야구장 구석에 앉아 가슴 한구석에 자리한 못다편 꿈을 꺼내보기를 몇차례.
98년말 KBO에서 심판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선수가 아니라면 심판이 되어서라도 그라운드에 서고 싶었다. 야구이론은 물론 우렁찬 콜소리, 체력테스트를 거쳐 176명 가운데 최종 선발된 6명중의 한명이 됐다.
16일 드디어 그라운드에 선다. 비록 관중의 시선을 모으는 선수도 아니고, 관중이 운집한 1군무대가 아닐지라도. 2군 심판원으로 그는 당당히 어릴 적 품었던 꿈에 화답한다. 동생 윤상원(24)이 현대 2군 외야수로 뛰고 있어 형제가 선수와 심판으로 나란히 서게됐다.
『동생이라고 봐주는 것 아니냐』고 묻자 『심판원은 정확한 판단을 정직하게 할 뿐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는 이미 프로심판이다. 글=이동훈기자 dhlee@hk.co.kr 사진=고영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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