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된 무용수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1921년 모스크바의 보헤미안 예술가 파티. 붉은색 긴 비단 키톤을 걸친 세계적인 무용수 덩컨은 자정이 넘어서야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한 러시아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청년은 눈에 띄게 아름다운 금발에 파란 눈과 부드러운 용모를 가진 사람. 세르게이 예세닌.첫 만남 후 몇 달 뒤 결혼. 17세 연상의 세계적인 무용수와 「오직 시를 위해 태어난」 러시아 방랑시인의 만남. 두 번 다시 없을 세계적인 러브 스토리. 하지만 도전적인 욕구 외에 그들은 언어, 고향, 자녀, 가족, 추억 등 공유한 것이 하나 없었다. 아내에게 술주정과 행패를 부렸던 예세닌은 결혼 3년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덩컨 역시 예세닌이 죽고 2년 후 유명한 「빨간 색 숄」 사고로 숨진다. 삶과 사랑과 예술, 무용과 시, 전통과 이상을 결합시키려했던 대단한 불협화음.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이었다.
이 책은 독일 로볼트 출판사가 내놓고 있는 세기적인 인물들의 사랑이야기 「짝」 시리즈 가운데 우선 네 권만 옮긴 것이다. 「남과 여_세기를 뒤흔든 지적 스캔들」시리즈로 제목은 「섹스와 지성」, 「기묘한 관계」, 「당신은 내 마음의 텍스트」, 「광기와 사랑」.
덩컨과 예세닌말고도 세계의 섹스 심볼 마릴린 먼로와 「세일즈맨의 죽음」의 작가 아서 밀러, 프랑스 혁명과 역사의 궤를 같이 한 살롱의 여신 스탈 부인과 정치신사 콩스탕, 또 철학자 니체와 바그너 부인의 사랑이 포함돼 있다.
덩컨과 예세닌의 만남이 다소 감상적이고 예술가적이었다면 마릴린 먼로와 아서 밀러의 스캔들은 다분히 비극적이다. 50년대 미국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매카시 선풍과 반대로 당시 문화를 휘어잡고 있던 섹스라는 이미지 상품의 기묘한 합작이었기 때문. 연극 연출가 엘리아 카잔의 소개로 젊은 시절 만난 뒤, 밀러가 마릴린 먼로에 사로잡히는 과정, 매카시 선풍이 한창일 때 결혼을 선언하는 장면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미국의 지성과 할리우드 인기상품의 결합이었지만 그들은 결국 서로의 이미지를 화해시키지 못하고 헤어지고 만다.
한 인물의 생애와 사상과 지적 편력을 그 인물의 역사적·사회적·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여러 각도로 비추는 것이 기존의 평전 스타일이라면 「남과 여」시리즈는 사적이고 내밀하다는 점이 다르다. 남녀의 운명적인 만남, 심리적인 요소들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애정과 증오, 소유의식과 자의식, 사상적 대립과 사회적·역사적 모순 속에서 충돌하고 화합하는 운명을 지닌 유명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엿보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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