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겐 「꺼벙이」 「재동이」가 낯설지 않다. 이들은 어린이 명랑만화의 인기작가였던 길창덕(69)화백이 탄생시킨 주인공. 고희를 앞둔 나이에도 그의 눈빛은 장난기 가득찬 초등학생같다.중학생때부터 만화그리기에 관심을 보였던 길씨의 데뷔는 55년 서울신문 독자만화 투고로 이뤄졌다. 『교사나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만화가 신문에 실리고 돈도 생겨 마음잡고 그리게 됐다』고 동기를 밝힌다. 그 해 신태양사의 잡지 「실화」에 「허서방」을 연재하면서 직업만화가가 됐다. 일간지연재는 73년 중앙일보의 「나원참여사」가 처음. 길씨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꺼벙이」와 「재동이」, 「순악질여사」를 통해서다. 특히 소년한국일보에 연재했던 「재동이」는 68~82년 14년간 4,726회나 계속됐다. 미술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재치 넘치는 대사에 단정한 그림선이 인기의 비결이었다.
길씨가 가장 아끼는 주인공은 꺼벙이와 재동이. 원래는 「메뚜기」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할 예정이었는데 당시 조풍연 소년한국 주간이 「똑똑한 아이」라는 뜻의 재동이로 바꿔주었다. 머리에 기계충 자국이 있는 바보스런 아이, 꺼벙이는 자신을 가장 많이 닮아 더욱 정이 간다. 꺼벙이와 재동이는 80년대 단행본으로 나와 지금까지 인기다. 만화 아이디어는 딸 넷의 자랄 적 행동에서 주로 따왔다. 신문연재는 89~91년 민주일보를 끝으로 중단했고 97~98년 현대정공 사보의 「미스터 현정」 연재를 마지막으로 길씨는 펜을 놓았다. 98년 고혈압과 당뇨로 석달간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한창 활동을 할 때 매일 밤을 새고 담배 4갑을 피워 54㎏에 불과했던 몸무게는 요즘 68㎏으로 늘었다. 지난해 정보통신부에서 「꺼벙이」우표를 만들자는 요청이 들어왔으나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힘들어 그만뒀다. 요즘엔 소학 한비자같은 고전을 읽거나 인근 야산에 산보나가는 일로 소일한다.
문하생을 두지 않은 길씨가 가장 아끼는 후배는 「맹꽁이서당」의 윤승운(尹勝雲·56)씨. 두 사람의 만화는 구불구불한 선이 닮았다. 길씨는 『만화가가 사회적 대접을 받는 것을 보면 참 좋다』면서도 『요즘 만화는 어린이 심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한다. 손자가 다섯이지만 『요즘 아이들 감성을 따를 수 없어 만화는 안 그릴 생각』이라는 길씨는 자신의 만화연보를 만드는 것이 마지막 꿈이다. /노향란기자 ranh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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