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주부·전북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잠을 자려고 불을 끄고 눕다가 창밖에서 스며드는 부드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빗소리였다. 봄비가 오시는구나! 창문을 아주 조금 열어두었다.
빗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이면 누군가 걸어오는 발소리같다. 봄비에는 새로 찾아오는 손님 발소리가 섞여 있고 가을비는 떠나가는 손님 발소리가 섞여 있다.
봄비에 섞여 있는 저 발자국 소리들은 꽃과 새, 나비, 새싹들의 자취일 것이다. 봄은 다시 돌아오는데…. 낮에 본 아버지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친정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만두를 쪄드리고 과일을 깎아드리다가 아버지의 앞니가 빠져 있는 걸 알았다. 앞니 하나 빠진 아버지 얼굴이 순간 아이처럼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리고는 서글픔으로 마음이 몹시 착잡했는데 나는 일부러 아버지에게 쓸데없는 수다만 열심히 늘어놓고 있었다. 아버지 치아가 빠진 자리는 검은 색을 칠해놓은 것처럼 까맣다.
언젠가는 아버지 입 속의 검은 어둠이 전부 흘러나와서 아버지를 어디론가 모셔가리라.
벌써 아버지 머리는 흰머리가 수북하고 목덜미에는 저승꽃들이 얼룩덜룩하지만 치아가 빠진 모습은 자식이 보기에 민망하고 허전했다.
방 윗목의 하얀 스치로폼 상자 속에서는 벌써 고추씨 싹이 나고 있었다. 올 고추농사가 벌써 시작된 것이다.
고추를 따는 여름이면 아버지의 마른 육신에서 진한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릴 것이다. 아버지의 노동을 보면서 나는 또 아버지가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사시리라는 착각을 할 것이다.
나는 별로 말이 없는 성격인데 늙어가는 부모님 앞에서 조금씩 수다쟁이가 되고 있다. 다른 사람과 수다를 떨면 돌아서면서 허전하고 후회가 되는데 부모님과 수다를 떨고 나서는 흐뭇하고 행복하다.
미국에서는 전자인형 퍼비가 유행이라고 한다. 퍼비는 수다쟁이인형인데 쉬지않고 재잘거리는 퍼비 대신에 잠자는 퍼비가 새로 나왔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조만간 우리나라에도 수입되면 외로운 노인들이 좋아할 장난감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과의 수다는 며느리에게만 미루고 무뚝뚝하게 뒤로만 빠지는 도시 사는 아들들이 미국의 퍼비인형을 닮는다면 참 좋겠다.
(C) COPYRIGHT 1999 THE
HANKOOKILBO
(C) COPYRIGHT 1998 THE HANKOOKILBO -
KOREALINK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