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인(작가)은 단 한 편의 시(글)를 꿈꾼다. 그 한 편으로 자신의 생과 이 세계에 완벽하게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언어의 구조물을 꿈꾼다. 일순간의 섬광과 함께 텍스트의 안과 밖을 동시에 폭파시킬 수 있는 강력한 불꽃의 언어를 희구한다』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39)씨는 94년에 낸 자신의 두번째 평론집 「신성한 숲」에서 이렇게 말했다. 5년이 지난 지금 그는 말한다. 『나는 아직도 홀로이며,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어느날 불현듯 나를 찾아와줄 어떤 미지의 언어를』
그의 세번째 평론집 「숲으로 된 성벽」(문학동네 발행)은 그 「완벽한 언어의 구조물」을 기다리고 찾아 헤맨 순례의 기록이다. 이 순례에서 그는 동시대 소설가·시인과 자주 한몸이 되고, 때로는 천박한 우리 문학풍토에 침을 뱉기도 한다. 그 순례는 그대로 90년대 한국문학의 궤적이다.
문학이란 것 자체가 함부로 종말이 운위되는 시대에 문학평론이라는 더 협소하고 난해해 보이는 분야가 문화대중들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남씨의 글은 이런 의구심을 타파한다. 그의 글은 시의 감동과 소설의 재미, 평론의 지적 언어가 한데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세기말」이라는 개념에 굳건히 토대를 두고 시인 황동규에서 소설가 김영하까지, 한국의 윤대녕에서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지금 한국에서 읽히는 문학이 왜 의미있고 어떤 한계지점에 있는가를 명쾌하고도 유려한 문장으로 보여준다.
그가 보는 세기말, 세기말의 한국문학은 어떤 것일까. 『세기말은 이제 더 이상 장엄한 아우라에 감싸여있지 않다…일상의 쳇바퀴만이 항상 과도기·전환기라는 이름으로 우리 모두가 누릴 권리를 갖고 있는 진정한 행복을 내일 또 내일로 유예시키며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세기말의 우리 문학은 그 어떤 거창한 시각, 강력한 담론도 우리를 그 속에서 구해내지 못하는 「진부한 일상의 늪」이라는 심연과 정직하게 대결하는 것에서부터 진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적 혼란은 물론, 일상에 대한 냉소를 넘어설 수 있는 사유의 지평을 암시해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기형도를 다시 읽고(그의 두번째, 세번째 평론집의 제목은 모두 기형도의 시 「숲으로 된 푸른 성벽」과 관련이 있다), 일상에 오히려 파묻혀버린 90년대 작가들의 위험성을 「댄디즘」의 시각에서 맹비판하고, 김영하 등 새로운 작가들이 보여주는 가능성을 이끌어냈다.
『모든 글쓰기가 그렇겠지만, 평론도 존재를 투자해야 하는 행위입니다. 이제는 비평가들도 개개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최근 우리 문학평론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소위 「뜨는 작가」가 나오면 평론가들도 너나없이 달려들어 평문을 양산해대는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문학의 상업주의화다. 『한국문학도 구조조정기입니다. 상업주의와의 싸움의 결과에 따라 우리 문학의 지형이 다시 그려질 것입니다. 문학이 영상매체에 밀린다는 식의 주장도, 양자의 대립 쪽으로만 문제를 몰고 가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 영상매체의 도전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창조적 응전이 필요합니다』
『이번 평론집을 묶으면서 나름대로 소설 보는 눈이 열린 것같다』고 말한 그는 앞으로는 사회를 향해서 좀 더 열린 쪽으로, 사회적 힘의 갈등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글을 쓸 작정이라고 말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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