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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은행은 제구실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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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은행은 제구실을 하라

입력
1999.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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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은행 등 금융기관들이 기업과 가계에 공급한 자금이 40조2,000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3분의 1수준으로 줄었다는 한은의 발표는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환란속에서 그 중심에 있던 금융기관들이 제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통화당국은 전에 없이 풍성하게 돈을 풀었으나 실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저 금융권을 맴돌았다. 그래서 기업들은 28조4,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는데 그쳤다.

이것은 88년 수준이다. 개인들도 29조원의 차입금을 도리어 상환,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65년이후 처음으로 차입금 규모가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소득이 환란의 타임머신을 타고 10여년 전으로 돌아갔듯이 은행 기능도 그이상 후퇴했다.

문제는 이러한 은행의 기능 상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들은 올들어서도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상황이 변화하고 있으나 은행은 변한 게 별로 없다.

한은 자료를 보면 일부 은행들은 예금으로 받을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이자율 8%로 정하고, 8%이상의 예금은 받지 않도록 하는 지침을 여전히 일선지점 창구에 보내고 있다.

예금을 끌어모아야 할 은행들이 저축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들은 워낙 실물경제가 어려워 대출할 곳이 없다고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예금을 거부하고 있는 은행, 대출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은행은 사실상 은행의 기능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구체적 사례가 쌓이고 있다. S전자는 이미 1조원이상의 자금을 확보, 은행대출금을 갚으려 했으나 아직 갚지 못하고 있다. 합병으로 새로 생긴 「리딩뱅크」라는 주채권은행이 『제발 돈을 갚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견그룹인 H그룹은 정부가 요구하는 구조조정으로 수천억원의 자금을 마련, 금융비용을 줄이기 위해 대출금을 갚으려 했지만 『참아 달라』는 은행의 부탁으로 갚지 못했다.

대기업만이 아니다. 잘 나가는 정보통신업체인 C중소기업은 적지 않은 지분을 외국에 처분, 300억원의 자금을 마련했는데 은행이 대출금 상환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은행들은 『앞으로 계속 거래할텐데 갚지 말고 참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정부는 은행 기능 정상화를 위해 64조원의 세금을 퍼붓고 있다. 돈 갚을 사람은 갚게 하고, 쓸 사람은 쓰게 하는 게 금융이다.

빚을 갚겠다는데 비공식적으로 막는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계약보다 일찍 갚는다면 「페널티」를 부과하면 된다. 무조건 은행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려 해서는 안된다. 은행이 제 기능을 하면서 새로운 금융질서를 만들어가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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