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원로 여배우 문예봉(文藝峰)이 26일 타계했다. 우리 영화사의 여명기를 밝혀 줄 또 한 명의 증인이 세상을 뜬 것이다. 1930∼40년대 최고의 스타였던 문예봉은 1965년 잡지 「조선영화」에서 나운규를 이렇게 추억했다.■「길이 빛날 천재의 업적」이라는 이 수필에서 문예봉은 일제 때의 고난과 북한 체제 하에서의 행복한 삶을 대비시켰다. 이어
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당시 북한 권력자의 의도를 잘못 읽었다. 권력자들은 구시대의 작가·예술가를 정치노선에 따라 재평가하고 있었다. 나운규는 「사상성이 없는 퇴폐적인 예술지상주의자·투항주의자·기회주의적인 영화감독」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더구나 「천재」등의 단어는 최고위층 외에는 쓸 수 있는 표현이 아니었다. 「공훈배우」 문예봉은 이 필화사건으로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다. 70년대 말까지 숙청 생활을 해오던 그는 80년 「춘향전」의 월매 역으로 복귀한 후 비교적 유복한 만년을 누렸다. 15세 때 나운규와 열연한 「임자없는 나룻배」로 데뷔한 문예봉은 호소력 있는 청순미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데렐라였다. 그 뒤 「춘향전」등에 출연하며 광복 때까지 「3,000만의 연인」으로 불렸다.
■문예봉은 유랑극단을 운영하던 아버지로부터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으나 열두살 때 어머니와 사별하는 등 불우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함흥 출신인 그는 48년 남편과 함께 월북한 뒤 「빨치산처녀」 「금강산 처녀」 등에 출연하면서 남한에서는 잊혀진 배우가 되었다. 현 정부의 「햇볕정책」이후 북에서 제작한 「임꺽정」이 우리 TV로 소개되는 등 북한영화가 한결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 영화사의 복원을 위해 문예봉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박래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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