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홍재형(洪在馨)전부총리 집에 2인조 강도가 들어 1명은 붙잡히고 1명은 달아났으며 홍전부총리는 이들과 격투를 벌이다 중상을 입고 입원 치료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강도가 전직 고위공직자의 집이라고 피해 다닐 이유도 없겠지만 전직 고위공직자가 용감히 강도에 맞선 것이어서 화제거리가 되었다.
이 강도사건을 보도하면서 신문들은 범인의 말을 인용해 범행동기를 밝혔다.
「경찰조사에서 범인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한 식당에서 우연히 홍전부총리가 집에 2조~3조원의 무기명 채권을 보관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범인은 『경제청문회를 보니 홍부총리집에 돈이 많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범행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범인은 사업체를 운영하다 IMF사태가 터진 97년말 사업이 망했다며 『그 원인이 경제책임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범인이 스스로를 ‘정의의 사자’라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이런 보도들이 나온 후 입원중인 홍전부총리는 각 언론사에 반론문을 보냈고 일부 신문은 그 내용을 게재했다.
「귀지의 기사를 읽고나서 혼자서 강도와 싸우면서 소리를 질러도 외부의 반응이 없었던 당시의 무력감과 절망감을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에게 중상을 입힌 강도(전과 7범)에 대한 확인과 심층보도 없이 단순히 그 강도가 말한 범행동기만을 인용보도함으로써 마치 본인이 장관 재직시에 크게 부정축재라도 한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한 상습범이 마구 떠벌리는 소리에만 확성기를 갖다 대고 있다는 말이다.
이 강도사건의 보도는 우리 사회가 범죄를 보는 시각의 한 단면을 표출한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강도는 오죽 딱했으면 강도질을 했겠으며 강도를 당한 사람은 얼마나 털릴 것이 많았으면 강도가 노렸겠느냐는 식의 인식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홍전부총리의 반론은 이에 대한 항의다.
최근 법무부는 법집행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내놓았다. 피의자들에 대한 불구속 수사원칙을 강조하면서 구속 수사가 많은 검찰은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겠다고 했고, 법정에 출석하는 미결수에게 수의 대신 사복 착용을 허용하겠다고 했으며, 장기복역의 모범수에게는 부부만남의 집을 마련하여 외박을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모두 인권과 인도의 차원에서 환영할 일이라고 박수를 치고 있고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정부·여당에서는 한편으로 인권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했고 인권위원회는 사법적 인권침해도 감시하게 된다.
그러나 감옥은 의인(義人)들의 합숙소가 아니다. 감옥이 천국이라면 죄 안지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물론 한 죄인을 처벌하는 일과 그의 인권을 옹호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아무리 죄를 지었더라도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더라도 죄인의 인권옹호가 죄의 옹호로 자칫 잘못 인식되는 결과를 낳아서는 안된다. 왜 이런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느냐하면 지금 우리 사회나 법은 가해자의 인권만 생각하지 피해자의 인권은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인권은 죄 지은 사람만의 특권이 아니다. 그 죄로 인하여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도 인권은 있는 것이다. 아무 잘못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범인에 의해 날벼락을 당한 채 평생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감옥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불행을 아는가. 이들의 피해를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인권이 신성한 것이라해서 가해자의 인권이 피해자의 인권을 희생시킬 권리가 있는 것인가. 가해자가 응분의 사회적·법적 징벌을 받지 않을 때 더욱 피해자의 인권은 유린되는 것이다.
「나의 비극은 너의 코미디」라고 한다. 강도를 만나 흉기에 찔린 사람은 지옥을 다녀온 사람인데 구경하는 사람들은 재미있어 한다. 그 남의 코미디가 언제 자신의 비극이 될지 알 수 없다.
범죄에 따라서는 한 개인이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피해자인 경우도 있다. 한 개인의 인권뿐 아니라 한 사회가 사회로서의 존엄을 지킬 권리도 사회 스스로가 수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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