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심각하다고 하는 왕따 문제를 들을 때마다 난 전주에서의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을 떠올린다.우리 반에는 세 살때 뇌막염을 앓아 지능도 낮았고, 다리가 불편해서 절룩거리는 형건이가 있었다. 지금같으면 「왕따」당했을 형건이는 따돌림을 당하기는 커녕, 5·6학년 2년 동안 우리 반의 중심 인물이 되었으니 그 사연인즉 이렇다.
젊고 의욕이 넘치던 우리 반 담임 임복근선생님은 학급신문을 만들자고 하시고는 학급신문의 고정란으로 우리 반 아이들의 가정탐방기를 쓰기로 했다. 아이들은 자랑거리가 많은 집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러나 선생님은 형건이네를 가장 먼저 방문하자고 하셨다. 반장이던 강서와 나, 현규가 기자 자격으로 형건이네를 방문했다.
형건이 부모님이 아들 친구를 맞아 해주시던 이야기와 그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릴 때 훤칠하게 잘 생겨서 대통령감이라던 세 살까지의 행복, 뇌막염을 앓은 뒤의 절망스럽던 시절, 한글을 배우는 형건이가 연필 쥐는 것도 너무나 힘들어 했었다는 이야기, 마침내 한글을 읽게 되었을 때의 감격, 처음엔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주다가 혼자 다니게 되었을 때의 기쁨 등등. 그리고 친구들이 잘 대해주어 고맙다는 말씀까지 간간이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 후로 형건이는 우리 반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강서와 나는 형건이 집에 자주 놀러 갔다. 형건이는 길에서 나를 보면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르며 뒤뚱거리며 뛰어 오곤 했다. 형건이는 졸업할 때 6년 개근상을 받았고, 형건이 어머니는 장한 어머니 상을 받았다. 신문에 형건이 이야기를 싣기 위해 기자들까지 찾아왔으니 졸업식이 형건이를 위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마터면 소외당할 뻔했던 형건이가 행복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그 날의 경험을 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매스컴에서 왕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임복근선생님같은 어른이 부족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서홍관 시인·인제대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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