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문화가 움직인다90년대를 마감하는 자리. 정치투쟁과 사회변혁, 포스트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 감성, 복고주의, 신드롬, 사이버와 힙합의 물결이 휩쓸고 간 빈 자리, 또는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자리. 거대 담론이 목소리를 잃자 세기말에 서있는 문화는 일견 공허해진 듯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여기에 경제적 궁핍은 우리의 정서와 사회·문화적 논쟁, 문화행위를 시들게 한다.
이런 문화 풍경 속에 작고 조용하고, 따뜻한 바람이 일고 있다. 불고 있다. 미풍이지만, 속삭이듯 아주 조용히 다가오는 바람결같지만,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혹시 한 인생을 바꿀 지도 모른다.
세상 살아가는 인정과 희망을 전하는 「작은 잡지」가 출판가에서 큰 유행을 타고 있다. 적은 돈으로 그림을 가질 수 있는 기회인 「작은 그림전」도 열린다. 명창(名唱)과 클래식 연주자들이 청중과 좀 더 가까이 만나기 위해 소극장 무대에도 선다. 우리는 이를 「작은 문화」라 부른다.
◆희망과 감동의 이야기들
『2년 전 병원에서 암으로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던 생일날 아침. 「축하한다. 꼭 완쾌해서 내년 생일은 집에서 함께 보내자」는 시아버님의 격려 전화를 받고 나는 울었습니다』 자잘하지만 정겹고, 눈물 핑 돌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들. 교통사고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마흔 살의 아들 손을 잡고 두메산골로 내려와 『농사 짓고 같이 살자』며 다독이는 아버지. 사귄 지 얼마 안되어 교도소에 간 남자를 기다리는 사연. 감기 든 손녀가 먹고 싶다는 초코 우유를 사기 위해 한 밤 중에 10리 길을 다녀 온 할머니 이야기….
조금 큰 호주머니에 넣어 갖고 다니며 버스나 지하철에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이런 류의 월간 생활교양 잡지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샘터」,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인」 등 서너 가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20종 가까이 이른다. 붐도 대단한 붐이다. 값은 2,000~2,500원. 올해 들어서만 「작은 이야기」, 「소중한 만남」, 「아름다운 사람」 등 수종류가 창간됐다.
작은 잡지의 선두는 92년 창간호가 1,000부도 팔리지 않았던 「좋은 생각」. 발행부수가 20만 부를 넘어섰다. 아마 모든 잡지를 통틀어 가장 잘 나가는 잡지일 것이다. 「샘터」 「작은 이야기」등도 10만부 이상 구독자가 늘었다.
작은 잡지들의 위력은 대단하다. 사람들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감옥에 있는 사람, 서울에서 술집을 전전한 스무 살 처녀가 잡지 속 이야기를 읽고는 사랑에 가슴 사무치고, 고향과 부모를 생각하며 운다. 그리고 『내가 변했다. 고맙다』는 편지를 연일 잡지사로 띄우고 있다.
샘터 이영희 편집장. 『IMF 이후 생활이 팍팍해지면서 마음에 양식을 주는 교양잡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전망이 부재한 시대, 황량하지만 그럴수록 희망과 행복과 삶의 평화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들을 감싸 안는 소품들이 문화의 한 층을 만들고 있다. 핍진한 시대의 시(詩)라고나 할까.
◆작은 것은 위험하다?
문학평론가 정과리씨. 『작은 이야기들은 자신을 고양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외부로 나아가는데는 약할 수밖에 없다』
작은 것은 아름답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걸까? 작은 잡지를 만드는 사람도 이런 한계를 느끼고 있다. 『앞으로, 더 크게 나아가는 것은 독자의 몫입니다. 작은 잡지는 사람들이 희망을 얻고 인생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밭을 갈아주는」역할을 할 뿐입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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