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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황지우 "많이 팔린 새시집 오히려 허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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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황지우 "많이 팔린 새시집 오히려 허탈"

입력
1999.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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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야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독자들을 포함해서 내 시를 진정으로 이해해줄 사람은 한 2,000명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집이 이렇게 많이 팔리니… 허탈합니다. 이래도 되나 싶네요…』황지우(47) 시인이 8년만에 낸 시집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발행)가 이른바 본격시집으로는 오랜만에 전국 서점가 시집 베스트셀러 1순위를 달리고 있다. 22일까지 이 시집은 7만부가 넘게 팔렸다. 청소년을 위한 연애시나 명상시들이 독점하던 최근 독서시장에서는 이변으로 받아들여진다.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80년대를 마감하는 의미를 지녔다면, 황씨의 시집은 90년대를 닫고 새로운 세기를 여는 한국 시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읽힌다. 그를 만나 최근 한국문학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 추구할 자신의 문학행위에 대해 들어보았다.

시적 실어증 정작 황씨 자신은 『왠지 나 자신이 「싸구려」가 된 느낌이다.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시집을 낸 데 대해 그는 『한동안 「시적인 실어증」에 걸려있었다』고 말했다. 그 실어증은 90년대초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것이었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에도 그것이 곳곳에 드러나있다. 『80년대는 너나할 것없이 할 말이 너무 많아 조금만 건드려도 불타버리는 휘발성이 강한 시대였습니다. 그 문학적 열기는 마치 침을 쏘아버리고 죽는 벌에 비유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니 90년대의 문학적 고갈은 당연했지요』 그는 90년대초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나 자신을 억압했던 또 다른 지표의 상실이었다』고 말했다. 그것이 실어증을 가져왔고, 그는 조각이라는 「말하지 않아도 되는 문화행위」에서 출구를 찾기도 했다.

문화정신의 통합 『진정한 문화적 정신은 통합적인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적 예술개념은 분야의 자율성에 대한 맹목적 추구로 전문화의 길로만 치달아왔지요. 문학도 그것이 갖고 있는 회화, 건축, 조각적 요소를 제거해나가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맹목적 자율성의 추구는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모더니즘의 끝은 예술의 죽음을 선고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다시 뒤섞이고 통합되는 다(多)장르의 과정에 있습니다』 그는 조각을 포함한 자신의 문화작업도 시가 중심에 있으면서 방사선적 관심으로 그것을 작품 안에서 통합하는 작업이 될 것이라 말했다. 그는 한 예로 얼마 전 국내에서 전시회를 연 조지 시걸의 조각작품을 보고는 『조각만으로도 연극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문학은 어떤 방향으로 나가게 될까 『두 방향으로 진전될 겁니다. 시민사회내 급증하는 문화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독자중심의 문학이 그 하나고, 끼리끼리 서로를 알아주는 문학_말하자면 「귀족문학」이 그 다른 하나입니다』 자신의 시집이 많이 팔리는 것에 허탈해하는 그의 지표는 다름아닌 「귀족문학」의 입장일 것이다. 『이전까지 문학은 핍박은 받았지만 그래도 독자에 대한 영향을 전제로 하는 「권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문화적 인재들이 모이는 집합장이었지요. 그러나 이제 그 힘은 사라지거나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문화적 재능을 가진 이들도 굳이 문학의 영토를 거쳐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학의 내적인 미학을 위해서는 고급한 수준의 미학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수요자 중심의 문학에 내용을 제공하는 컨텐츠웨어(contentsware)가 됩니다. 그래서 독자도 같이 성숙해가는 것이지요』

작업과 예술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는 황씨는 6강좌를 맡아 일주일에 18시간 정도나 강의한다. 연구실에는 그가 만든 조각작품도 있고, 영화 비디오테이프도 수북하다. 『한때는 이창동씨와 영화를 하자고 굳게 다짐하기도 했었지요(웃음). 그는 영화로 가고 나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최근에 그는 김지하 시인의 사상기행 취재에서 직접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사진전도 4월에 열린다. 문화적 인간(Homo Culturatis)이라고 그가 정의한 예술인의 모습이 그의 이같은 작업에 숨은 의미를 보여주는 듯했다. 올 여름에는 처음으로 석조를 만들어 볼 생각도 하고 있다. 『석조야말로 진짜 조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항이 가장 센 매체를 다뤄야 하는 「노동」이 들어가는 작업이지요』 그는 곧 한시(漢詩)의 분위기가 있는 작품을 20~30편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한시에는 대상도 있고 나도 있습니다. 이제 내적인 격(格)을 가다듬고, 남에게 복된 말,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전까지 자신의 시작행위를 「일종의 정규방송에 대한 전파교란」이라고 정의한 그는 「복음」이란 단어로 새로운 추구의 방향을 밝혔다. 『문학판이 구심점도 없고 이슈도 없는 요즘 새삼 돌아가신 김현 선생 같은 분이 그리워집니다』고 그는 쓸쓸한 얼굴로 덧붙이며 말을 맺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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