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석방된 미전향장기수들의 북송여부에 대해 토론하는 TV프로에서 한 교수는 「장기수 어른들」이란 호칭을 썼다. 나는 그말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그들에게 거부감을 품고 있지는 않다. 사상을 지키기 위해 40여년의 감옥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을 나는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다. 북에 살고 있는 가족들때문에 전향서를 쓰지 않았을 거라는 해석도 있지만, 신념과 가족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오늘의 북한이 그들의 선택을 보상해줄만한 대상이냐는 것이고, 그것이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수많은 한국인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이런 말을 하면서 나는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지 새삼 실감하고 있다. 지금이 냉전시대라면, 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진다. 미전향장기수를 「어른」이라고 부르거나 「경이롭다」고 쓴 사람은 보안법7조1항 찬양고무죄에 걸려 벌써 잡혀갔을 것이다. 재판이전에 정보부로 끌려가 반쯤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져서 나같은 겁쟁이도 이런 글을 쓰고 있다.
남한은 이렇게 변했는데, 북한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변한 것도 있다. 굶어죽게 됐다고 세계를 향해 원조를 요청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크게 변한 것이다. 남루함을 숨기고 『이 세상에 부러움 없어라』라고 노래하던 불과 몇년전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그뿐이 아니다. 최근 금강산에 다녀온 한 주부는 『금강산에 줄을 지어 올라가는 남한 관광객들을 보면서 남북관계가 얼마나 변했는가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극심한 경제난 때문이긴 하지만 북한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김대중대통령은 1년전 새정부의 대북정책으로 「햇볕정책」을 표방하고 나섰다. 나는 그 단어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이솝우화에서 햇볕은 강풍이 벗기지 못한 행인의 외투를 벗긴다. 김대통령은 야당시절부터 햇볕정책을 주장해왔는데, 냉전시대에는 그 말이 적절했다 해도 오늘에는 맞지 않는다. 북한으로서는 「외투를 벗기려는 햇볕」이 기분좋을 리 없고, 남한에서도 한없이 온정만을 베푸는 정책이라는 오해가 있었다. 그후에 나온 「포용」이란 말도 우월적인 단어다. 평범하지만 「공존공영」정도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제 대북정책은 어휘의 문제가 아니다. 참고 달래고 필요한 도움을 주면서 북한의 개방과 변화를 이끌어내자는 「햇볕정책」은 오늘 한반도의 현실에서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유화정책도 안보를 양보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안보는 사실 시비거리가 아니고, 문제는 온정주의의 강도와 속도다. 상호주의 역시 당장 눈앞에서 주고받느냐, 좀더 장기적으로 시간을 두고 받아내느냐의 문제다.
작년 북경회담에서 상호주의를 내세워 북의 비료원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정부는 올 봄에 적십자 모금을 통해 북한에 비료 5만톤을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비료값 150억원과 수송비 15억원 정도를 모금하겠다지만 결국 정부가 상당액을 부담하게 될 것이다. 야당은 국민세금으로 북한을 지원하려면 국회동의를 얻어야한다고 주장하고, 적십자 모금형식을 빌리려는 정부의 궁색함과 「탄력적 상호주의」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 자립할 기력을 잃고 쓰러진 형제를 떠맡게 되는 것과 어느 정도 자립하도록 도우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이 손해와 갈등이 덜할까. 그것은 이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는 차원이 아니다. 정권은 바뀌어도 북이 우리의 형제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고, 그들의 굶주림도 당분간 바뀔 전망이 없다. 미루면 미룰수록 우리가 치를 몫은 더 커질 것이다.
햇볕정책은 외투를 벗기려는 정책이 아니라 희망을 키우는 정책이어야 한다. 변화하면 살 수 있다는 희망, 비료를 주면 풍년이 올 것이라는 희망, 남한은 적이 아니라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북한에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희망만이 그들을 변화시킬 것이다. 비료는 보내야한다. 비료를 보내려는 마음이 우리들 사이에 널리 퍼져서 어떤 정부가 「강풍정책」을 쓰려해도 막을 수 있는 힘이 돼야 한다. /주필 msch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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