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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댐 총점검] 아우라지 휘감던 아리랑가락도 끊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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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댐 총점검] 아우라지 휘감던 아리랑가락도 끊긴다

입력
1999.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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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대책 '따로따로'동강 영월다목적댐 건설 추진과정에서 댐건설로 수몰될 이 지역 문화재 보존등을 위한 건설교통부 환경부 문화관광부 등 관련 부처 실무자 전체 합동회의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16일 확인됐다. 또 수자원공사는 평창군 등 관련 3개군 및 주민의견을 수렴해 문화재관리국과 협의할 계획을 통보하고도 2년이 넘게 협의를 하지 않은 사실도 확인됐다.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이날 『수자원공사는 96년 11월 댐 건설을 추진하면서 천연기념물 206호 백룡동굴 보존에 대한 지자체 및 주민 의견을 최종 수렴, 향후 협의할 계획이라고 문화재관리국에 통보했으면서도 2년이 지나도록 아직 협의요청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댐건설과 관련해 입장이 유사한 환경부와 문화부는 긴밀히 협의를 해왔다. 91년 9월 동강댐 건설과 관련,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한 환경부는 문화부에 검토를 98년 4월 요청했다. 문화부는 98년 6월 현지에 문화재위원 등 8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 3일 동안 조사를 벌였다.

문화부는 이 해 7월 환경부의 환경영향평가 검토 요청에 대한 최종 회신을 보냈다. 핵심적 내용은 동강댐 건설이 남한강 상류의 하천 기능을 상실케 하며, 수몰지역 및 상류지역의 생태계 보존방안 마련이 필요하며 환경영향평가 결과 재검토 백룡동굴 보존방안에 대한 재검토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한편 문화재관리국은 97년 3월 백룡동굴은 수몰 후에도 천연기념물로 보존돼야하기 때문에 철저히 보존해야 한다는 검토 의견을 평창군에 통보했다.

98년 조사단 조사결과 동강 영월댐 수몰지역에는 철기 신선기 유적 19개소, 천연기념물 260호인 백룡동굴, 어름치 수달 황조롱이 새매 등 천연기념물 10여종과 희귀 담수어 10여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에 참여한 강원대 원종관(지질학과)교수는 『영월댐 건설계획은 백지화돼야 하며, 국가적 차원에서 꼭 필요한 경우 백룡동굴이 수몰되지 않을 정도로 댐 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조사의견을 문화재관리국에 제출했다.

서사봉기자 ses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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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덕포 꽁지갈보야 술판 차려놓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동강을 가르던 떼꾼들이 수백년 읊어온 정선아리랑. 정선의 신라때 이름은 잉매현. 「천천히 흐르는 강」이라는 뜻의 이두식 표현이다. 정선아리랑의 고향은 아리랑의 곡조만큼 많은 사연을 담고 있다.

오랜 세월 흘러온 동강에는 우리 조상들이 남기고 간 숱한 역사의 흔적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세월을 견디고 있다. 지형특성상 자연 보존이 가능했기에 유적과 유물들은 어느 지역보다도 넓고 다양하게 분포돼 있으며, 그 사이사이에는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긴 무형의 유산들도 아스란히 숨쉬고 있다.

정선아리랑을 비롯한 지역 역사문화 연구와 보급에 주력하고 있는 진용선(秦庸瑄·36·정선아리랑 연구소장)씨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이 곳에는 고인돌 적석총과 산성 등이 비교적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고 말한다.

진씨를 비롯한 대학 학술팀 등은 그동안 운치리 고성리 귤암리 등에서 신석기시대 유적 7곳과 청동기시대 고인돌 13기, 철기시대 적석총 6곳 등을 발견했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단사선무늬토기, 청동기시대 돌도끼 돌주걱칼 반달돌칼 등 학문적 가치가 뛰어난 각종 유물이 잇따라 출토됐다. 진씨는 『최근까지도 학술팀과 연계해 자료조사를 계속하고 있어 더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될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밝혔다.

지방문화재인 고성리산성도 나이를 잊은 채 동강을 내려다 보고 있다.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 고고산(해발 425㎙) 8~9부 능선에 위치한 산성은 성벽둘레 700여㎙로 고구려의 남진과정에서 축조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 유물과 지표조사결과 산성은 목책(木柵)이나 토루(土壘)로 지어졌다가 삼국시대 들어 개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산세가 험해 길 내기가 힘들었던 이 지역 주민들은 동강을 통해 외지와 내왕하곤 했다. 특히 강원지역의 원목을 서울까지 실어나르기 위해 동원된 뗏목은 동강의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으로 자리잡았다. 기록에 의하면 60년대 초반까지 뗏목이 오갔다. 진씨는 『1867년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해 이 지역에 원목 동원령이 내려져 전국의 내로라하는 떼꾼들이 후한 떼삯을 보고 정선으로 모여들었고, 이들의 주머니를 노린 주막집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곳곳에 생겨났었다』고 당시의 역사를 설명했다. 떼꾼들을 상대로 한 주막집이 100여곳, 500명 정도의 전국 기생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서 애창된 노래가 바로 정선아리랑. 뗏목을 탈 때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불려진 정선아리랑은 떼꾼과 기생들을 통해 이렇게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냈으니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차려놓게」

진씨는 정선아리랑 가사에 들어갈 정도로 전산옥이란 기생은 소문이 자자했다고 밝혔다. 뗏목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가수리 수미나루터에는 노래에 나오는 주막집이 그대로 서 있다.

산성과 고인돌군락지, 정선아리랑 가락에 스며있는 숱한 기억들…. 댐이 들어서면 각종 문화재들과 민속 문화의 보고(寶庫)들은 물속에 잠기고 만다. 어라연의 깊은 계곡을 휘감아도는 정선아리랑의 구슬픈 곡조는 더이상 메아리치지 못하고 있다. 정선=염영남기자 ynyeom@hk.co.kr

* "동강을 막는건 삶의 물길을 막는것"

『물만 나면 강을 뒤덮고 내려가던 떼들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동강의 무수한 물굽이엔 떼꾼들의 애환이 서려있다. 40여년을 떼(뗏목)를 탄 「떼꾼」 신경우(申景雨·77)옹은 쉽게 영월댐에 동조할 수 없다. 이곳에서 14대를 살아온 신옹에게 떼는 삶을 지탱해준 수단이었으며, 동강은 그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동강이 막힌다는 것은 그에겐 삶의 물길이 막히는 것이다.

정선의 아우라지를 떠나 영월까지 오는 떼는 위험한 깊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다고 해 「골안떼」라고 불렸다. 떼가 뜰 수 있을 만큼 「큰물」은 많을 땐 한 해 10여차례가 넘었지만 적을땐 4~5차례밖에 되지 않았다. 신옹은 『음력 3월에도 눈이 녹아 큰물이 나면 떼가 나갔고 어느 해는 10월 살짝 언 강을 깨면서 떼가 나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골안떼 한판은 대략 120~150그루의 나무로 엮었는데 3~6㎙ 크기의 나무 18~20여 그루를 칡으로 묶어 만든 나무 동(棟) 3개를 이어 부쳤다. 신옹은 『전봇대로 쓸 25자(약 825㎝)짜리 나무가 나갈 때도 많았다』고 말했다. 아우라지에서 떠난 떼는 물이 좋으면 2~3일 걸려 영월에 닿았지만 2주일이 걸릴 때도 있었다.

떼꾼에겐 살아남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우라지 바로 밑의 상투배리, 정선군 용탄리의 범여울,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앞의 황새여울, 어라연(魚羅淵)을 지나 만나는 된꼬까리 등이 무수한 떼꾼을 삼킨 지역이다. 신옹은 『바닥에 칼같이 솟은 바위가 칡을 끊거나 사나운 물살에 제때에 방향을 잡지 못해 떼가 바위벼랑에 부딪혀 사공이 죽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위험했지만 삯도 많아 떼가 뜰 때가 되면 전국의 떼꾼들이 정선으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떼돈 벌었다」는 말도 나왔다. 진짜 떼꾼은 떼의 앞자리에서 조종하던 앞사공을 말한다. 동강의 떼꾼과 앞사공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신옹말고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열여덟이던 40년부터 떼를 타기 시작해 셀 수없이 골안떼와 강떼를 탔다』는 신옹은 『동강변엔 셀 수 없이 굴이 많은데 댐을 막으면 어디로 물이 터져나올지 모릅니다』고 말했다. 한평생을 동강과 함께 흘러온 「마지막 떼꾼」의 경험에서 나온 우려였다.

영월=김동국기자 dkkim@hk.co.kr

* "동강은 민속자료의 보고"

동강의 자랑은 생태계만이 아니다. 민속자료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동강일대의 풍물과, 이 지역 사람들의 애환을 가사로 하고 있는 정선아리랑을 제외하고도 뗏목노래, 뗏목관련 아리랑, 단에서바우밑에, 괭이소리 등 숱한 민요들이 이 일대에 남아있다. 동강일대에서만 48종 277수의 민요를 채집되기도 했다. 민속학자들은 단일지역에서 이렇게 다양하고 풍부한 민요나 음식, 생활도구들이 남아 있는 곳은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동강에서 남쪽으로는 구미아리랑, 북쪽으로는 흑룡강성아리랑, 동쪽으로 동해별신굿아리랑, 서쪽으로 여주아리랑 등 정선아리랑에서 파생된 민요는 28종에 이른다.

음식문화도 독특하다. 「동강에 산 사람은 평생 쌀 한말을 못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쌀이 귀해 옥수수 감자 콩 등이 주식이었다. 감자로는 밥을 비롯해 시루떡, 송편, 부침개, 만두 등을 만들어 먹으며 감자를 갈아 나온 녹말가루와 감자를 섞어 소금으로 간을 마춘 감자옹심이는 별미다. 메밀로 만든 국수인 콧등치기, 메강냉이로 만드는 올창묵, 밀가루에 콩가루를 섞어 만든 국수인 가수기, 곤드레나물과 강냉이 쌀을 넣어 만든 밥에 소금과 기름으로 볶은 곤드레밥 등을 맛볼 수 있다.

마을에 들어가보면 조상들의 손때가 묻은 생활도구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정선군 신동읍 운치리앞 동강에는 아직도 주민들이 가을걷이가 끝나면 품앗이로 섶다리를 놓는다. 다리는 봄 큰물이 떠내려 갈때까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한해살이다. 나무를 파내 만든 뒤함지박을 아직도 만들어 사용하고 있으며 디딜방아나 연자방아도 최근까지 사용했다. 동물을 잡는 덫인 창애도 새를 잡는 것부터 큰 동물을 잡기 위한 것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아름드리 피나무의 속을 파서 만드는 피나무김치통은 밑에 나무를 받쳐 갓김치 등을 담아 먹는데 쓰였다. 이곳에서는 특히 싸리나무 등 가는 나무를 엮어 곡물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든 채독에 소똥을 이겨 발라 사용했는데 섬유질의 소똥때문에 감자나 고구마가 쉽게 썩지 않았다. 피나무김치통과 소똥을 바른 채독은 플라스틱 김치통등 대체품에 밀려 이미 이 지역에서 사라졌다. 정선=김동국기자 d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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